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

 1  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1
 2  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2
 3  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3
 4  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4
 5  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5
 6  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



1. 잡가 담당층의 변모양상
2. 장르의 성격


잡가는 다른 시가양식처럼 규격화되고 고정화된 노래가 아니다. 끊임없이 생성되면서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 온 가장 생동적이며 개방적인 서민문학의 한 양식이다. 이러한 잡가를 하나의 독립된 시가 양식으로 볼 수 있는지의 여부는 계속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잡가의 장르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유행가로 보는 견해(고정옥), 가사의 하위 범주로 보는 견해(조윤제), 민요로 보는 견해(이병기), 독립된 장르로 보는 견해(정재호, 김문기)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1980년대 이후는 대부분 잡가를 독립된 문학양식으로 다루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개별 양식으로 독립성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 범위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잡가란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요, 가사, 사설시조, 판소리 등 다른 양식의 문하고가 교류하고 혼합하며 그 가운데 생성된 노래로서 기존의 어느 양식에도 귀속시킬 수 없는 다양성을 포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잡가의 이러한 개방적이며 혼합적인 속성에서 우리는 조선조 말엽의 도시 하층민 특유의 복합적인 정서와 그 형상화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문학양식들은 거의 모두가 상층 지식인의 향유물 이었으며 서민 계층의 참여가 이루어진 예외적인 문학으로 민요와 판소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광대에 의해 창이 된 판소리의 경우 식자층의 손질을 거치거나, 양반을 의식한 현학적인 문구의 나열 등으로 순수한 서민문학으로서의 면모를 상당부분 잃었다. 그리고 민요의 경우에도 유희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기능요는 노동의 현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의 서민 혹은 유랑 하층민의 정서를 그대로 전달해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의 현장이나 생산의 현장에서 부른 민요는 창자가 곧 향유자라는 일원적 체계를 지니며 이것은 전문적인 소리패에 의해 광범위한 수용층을 상대하여 정서적 호응을 불러 일으켰던 잡가과 비교할 때 서민적 정서의 집약이라는 점에서 대등한 위치에 놓이기 어렵다. 민요 중에서도 서민층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력이 강한 노래들은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되고 또 그에 적합한 내용적 변화를 거치면서 잡가화 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지방의 육자배기라든가 평안도 지방의 수심가와 같은 것들이 이러한 예가 된다.
여기서 사용한 서민적 정서란 용어는 식자층의 정제된 문학에서 나타나는 사대부적 정서와는 변별되는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못하고, 교육적으로 열등한 서민 내지 하층민 특유의 정서를 뜻한다. 고급문화가 창작자의 의도나 심미적 판단을 결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창작자 지향적 문화라 할 수 있는데 비해 잡가는 일종의 대중예술로서 사용자 지향적 문화이며 수용자의 가치와 원망을 만족시키는 데 보다 치중하였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이런 잡가의 성격을 장르적인 논의와 더불어 설명해보고자 하고, 또한 잡가를 담당했던 계층의 성격 또한 파악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런 장르적인 성격과 담당 계층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다른 논의들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잡가 담당층의 변모양상
잡가의 담당층은 서민층 이하의 집단이라는 것은 이미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들 잡가의 악곡적 명칭일 12잡가, 휘모리잡가, 경서남도잡가의 경우, 천기 및 남자소리꾼, 유랑연예집단이 그 가창을 담당했다. 또 그들의 청중일 서민층 및 그 이하의 집단이 이 노래들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12가사의 담당층의 경우에는 최하층의 가창집단은 물론이지만 고급의 가창집단-고급 기생 및 중인 가객층-도 참여하였고 양반 계층도 수용하였다. 그리고 단가는 비록 하층신분의 광대가 가창한 것이었지만, 그 수용집단에는 일부의 양반계층도 해당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을 통하여 잡가의 담당층은 상당히 변모하는 양상을보여준다. 물론 12가사나 단가의 경우는 애초부터 일부의 상층집단에게도 수용되었으며 또 고급예능집단에게도 가창될 수 있었음으로 인하여 그 담당층의 주목할 만한 변모현상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19세기의 12잡가, 휘모리잡가, 경서남도잡가와 같은 순수서민집단의 잡가에 있어서도 그 담당층은 매우 변모하게 된다. 즉, 종전 같으면 가곡창이나 불렀을 기생과 중인 가객 등의 고급가창집단들도 이 잡가들을 가창하게 되고 양반계층까지도 수용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한편, 이런 변모양상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19세기 당시의 잡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배경들을 주목할 수가 있다.
첫째로, 19세기 잡가 담당층의 그러한 변모양상은 사실상 당시 전반적으로 진전된 사회구조적 변화와 병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데 조선후기사회의 변화과정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변화요인일 경제구조가 특히 급진전되어 이른바 유통경제가 일반화되고 천하게 인식되던 상공업의 발전이 훨씬 팽창됨으로 인하여 서민계층은 경제적 힘을 배경으로 급격히 부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지배계층에 억눌려 있던 수많은 서민계층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고 큰 세력을 형성하게되면서 서민층의 문화양식도 비공식적 위치로부터 비약적으로 부상할 수 있는, 충분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만나게 됨으로 인하여 잡가장르는 매우 광범위한 인기를 확보해 갈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