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가의 담당층의 성격과 그 장르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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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잡가의 담당층의 성격과 그 장르적 문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잡가의 담당층의 성격과 그 장르적 문제
서론
시가사상 잡가만큼 그 장르의 유사성을 찾을 수 없는 작품군도 없을 것이다. 잡가군을 이루는 작품들은 하나의 공통적 범주에 넣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다. 따라서 그 연구 초기에도 뚜렷한 장르적 특성을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잡가는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20세기초라는 특정시기에 시정문화권을 바탕으로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역사적 장르인 만큼 그 중요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잡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점차 베일 속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음에서 우리는 잡가의 담당층의 성격과 그 변모양상, 그리고 그 장르적 문제에 대한 여러 논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
본론
1) 잡가의 담당층의 성격
1. 잡가의 담당층의 성격과 가창시기
하층민의 구비문학으로서의 잡가의 담당층은 그 첨예한 실증작업에 의존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즉, 구비문학에 있어서 그 작자와 창자, 독자는 첨예한 의식의 격차가 없는 결국 동질적인 집단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가의 경우에 있어서 그 작자나 청자 혹은 독자 중에서 어느 한쪽만 밝힐 수 있으면 잡가의 담당층 전체집단의 성격을 규명할 수가 있다. 특히 작자가 대부분 드러나지 앉는 잡가에 있어 우리는 창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에 의존하여 그 담당층의 윤곽을 이해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조선조의 경우 그 사회제도가 이미 경직된 것이듯 시가 장르의 향유방식도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양반지배층은 비교적 고급의 기녀의 가창을 통하여 그들의 국문시가장르를 향유하였고, 이에 반해서 서민층은 천기와 같은 최하층신분의 창자 아니면 자기자신들의 가창에 의존하는 등 창자와 수용자의 신분별 향유 방식이 고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담당층의 구체적 실상은 모두 드러내진 못할지라도 그 가창집단의 해명작업에 의거하여 담당층의 전체적 윤곽만은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잡가의 담당층과 가창시기를 논의하기 앞서서 우선 담당층의 전체적인 신분은 하층민임을 전제해야 한다. 12가사, 12잡가, 휘모리잡가, 단가, 경서남도잡가 중에서 12가사와 단가를 제외한 나머지 잡가들은 모두 서민적 시가장르이며 더구나 12가사와 단가마저도 사대부적 시가양식일 수만은 없음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순수한 서민적 시가장르에 해당될 12잡가와 휘모리 잡가, 그리고 경서남도잡가의 담당층과 가창시기부터 살펴보자.
12잡가에 대해서는 국악계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성경린을 들 수 있는데, 성경린은 立唱이라는 선소리와도 다르고 더벅머리 三碑의 소릿조라는 것만 안다고 하고, 이들 노래의 창자로서 나라의 進宴에 참례하던 기생은 잡가 따위는 애초에 옮기지도 않았으며 매우 천히 알던 소리로 女流로는 곧 三碑의 아가시오 남자로는 사계축 (현재 서울의 청파동 일대 지역) 소리꾼들이라고 하였다. 즉, 서울의 각처에 실재하여 매춘매소를 행한 娼女집단인 三碑 遊女들이 잡가를 잘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계축을 중심으로 하여 서울의 우대, 아랫대, 문안밖에서 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던 사계축 소리꾼들이 잡가를 팔면서 생활했는데 특히, 유명한 명창으로서는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중 조기준은 애우개에서 갓쟁이였고 박춘경은 밭쟁이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당시의 잡가패들은 본업과 노래를 병행한 반전문적인 소리꾼들이었으며, 적어도 19세기 말기로 오면서 전문화된 소리꾼 및 유녀로 전환된 것 같다. 그러한 예를 들면, 우선 1898년 광무초에 서울 동대문안 협률사란 흥행극장을 들 수 있는데 이 극장에서 경서남도잡가 및 12잡가, 휘모리잡가의 명창들인 박춘재, 문영수, 이정화 등이 전문적으로 일반흥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898년을 전후한 시기 즉, 19세기 말기에는 이미 그들은 전대의 스승인 추.조,박의 반전문적인 생활로부터 전문적 창자생활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전대의 유녀 출신인 보배, 홍도, 강진과 같은 천기들이 명창의 자격으로 이런 흥행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전대의 유녀들도 전문적인 잡가의 창자로 전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12잡가의 창자집단이 매우 말단의 신분들임을 볼 때 그들의 노래 즉, 잡가를 향유한 수용집단도 서민층이거나 그 이하의 신분계층임을 강력히 시사 받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