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컨텐츠] 기독교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 밀양 - 인간의 용서, 신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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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기독교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 「밀양」
인간의 용서, 신의 구원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 않았다. 답답한 영화간의 공기가 모조리 내 목을 조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콜라를 얼음과 함께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도 갈증이 사라지질 않았다. 당장 이 문 밖을 치고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끝은 언제 날 것인가.
영화의 색체는 황금빛을 띄고 있었다. 밀양의 분위기와 걸맞게 나른하면서도 조용한 색체였다. 특별한 효과나 장치도 없었다. 너무도 현지인 같았던 송강호와 리얼하게 미망인 같았던 전도현의 모습이 이 영화의 큰 장치였다. 영화표를 구입하기 전엔 왜 하필이면 이 영화를 봐야만 하나 불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평택에 영화를 보겠다며 나온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려는데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코믹물도 있었는데 포스터 자체에서부터 우울함을 풍겨내는 이 영화를 고른 엄마가 못내 못마땅했지만 영화의 포스터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엄마를 보고서는 아무 말 없이 표를 끊었다. 사실, 아버지가 목회를 하고 계셔서 밀양의 제작 발표에서부터 부모님의 큰 관심을 끌었다. 나는 컴컴해진 영화관 속에 스크린 불빛에 몽롱해진다.
끔찍했다. 사실 자식을 낳아보지도 못 했고 자식을 잃은 기분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전도현의 절규와 울부짖음은 내 가슴을 두드렸다. 남편을 잃었고 남편이 살고 싶어 했던 밀양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사 왔다. 정 붙일 곳도 없었으며 남편의 분신인 아들 하나를 믿고 근근이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허세를 조금 부렸던 것이 아들을 잃었고 자기 자신을 잃었다. 영화는 범인이 누구일까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단순히 반전 영화로 만들어진 영화였다면 이토록 잔인하진 않았을 것이다. 피를 흘려가며 찢기고 부서지는 잔인함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정신적인 피폐함을 주는 영화였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부딪히는 인간의 절망과 처절함이 나를 괴롭게 했다.
영화는 원작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을 유지한다. 다만 원작은 영화와는 다르게 특정한 종교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사회적인 구원과 용서를 다룬다는 점이다. 책은 구원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피해자의 대한,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영화를 세심하게 기독교적 관념에서 살펴보면 이것 또한 영적인 구원과 인간으로서의 용서가 이중적으로 나열되면서 깊게 생각해보게끔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살펴보도록하자.
그녀는 연약한 애벌레의 모습이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은 곤충에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상은 등을 돌렸고 그녀는 갈 곳이 없었다. 이 영화의 중점을 두어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일까. 영화를 보는 관객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법도 다양하겠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큰 의문점을 가졌던 부분은 바로 용서였다. 용서의 의미, 용서는 이미 나를 포기한 것이다. 나의 이익과 나의 상처 그런 모든 것들을 버리고 상대방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금기시 하였던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베어 물었을 때 그들을 용서하시고 세상 밖으로 보내셨다. 영적인 죽음, 그것이 가장 큰 형벌이 되겠지만 그들의 자손인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육신으로 보내주시고 그가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의 죄는 씻음 받았다. 용서다. 태어나면서 용서를 빌며 태어나지 않았다. 그저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세상에 나온 것을 떠들썩하게 알렸다. 그런 우리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용서를 받은 것이다. 영적인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 피아니스트의 꿈도, 남편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도,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과 처절함 비참함 그리고 분노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에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을 따라 간 곳은 교회였다. 그녀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교회에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울었다. 뭔지 모를 감정에 뜨거운 눈물을 퍼부으며 절규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삶은 이후로 많이 달라졌다. 어둠 속에서 외로워했고 절망 가운데서 움츠렸던 그녀가 세상 밖에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 소통했다. 또 함께 웃었다. 세상에서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품에 속한 영적인 관계였다. 함께 기도를 드렸고 매주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봉사하고 순종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결심한다. 그를 용서하기로.
여자가 자신의 뱃속에서 열 달을 품어 세상 밖으로 내보낸 피 같은 자식을 한 순간에 남의 손에 의하여 잃었다. 용서의 개념을 떠나 쳐다보기만 해도 몸이 부르르 떨리는 그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하나님을 믿어 용서를 배웠고 사랑으로 이해하려 했겠지만 보통 결심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녀가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와 유리벽 사이를 두고 마주한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안부를 물었고 그는 너무나도 평온한 모습으로 대답한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못난 영혼을 용서하시고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해 주셔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