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니우스 교육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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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코메니우스 교육학개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과학적(감각적) 실학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코메니우스에 관련된 참고자료를 소개합니다. 그는 체계적인 교육학 저술을 처음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초등교육 또는 민중교육에 방법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준 사상가입니다. 루소, 프뢰벨, 니힐, 듀이 등과 같은 걸출한 교육사상가들도 코메니우스의 영향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수업시간에 소개할 만한 여유가 없어 참고자료로 제시하는 것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에 제시한 자료는 우메네 사토루 지음, 김정환 외 옮김, [세계교육사](풀빛, 1994)의 151∼161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 연금술적 교육학 :
독일의 철학자 수프랑거는 [독일 초등학교사에 대하여]라는 글 속에서 17세기의 독일 교육학자는 ― 그 대표는 코메니우스이다 ― 당시 유행하던 연금술사와 비슷했다고 말하고 있다.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다. 결국 연금술사가 근처에 널려 있는 하찮아 아무도 돌아다보지 않는 돌멩이나 광물에서 금이나 은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는 어린이의 교육이라는 것으로부터 황금과 같은 이상사회가 생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연금술적 교육학이라는 것은 실은 17세기의 독일에 한정되지 않고 그 후에도 계속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교육에 의해서 사회가 개조 또는 변혁되고 유토피아가 실현된다는 생각은 많든 적든 오늘날의 소위 진보적인 교육학자들에게 공통된 것이며 그 신념 때문에 교육에 실로 커다란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교육만으로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17세기의 연금술과 마찬가지로 결국 실패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므로 그러한 독선적인 교육 만능론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이 사회개조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오히려 최근에 이르러 점점 광범하게 인식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7세기에 시작한 연금술적 교육학이라고 하는 것은, 청소년의 교육을 정치의 문제, 사회개혁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생각하는 교육문제에 대한 현대적인 취급방법의 선구를 이루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교육연금술사 중 최대 거장은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였다.
- 코메니우스 :
코메니우스는 원래 독일인이 아니었다. 보라비아에서 출생한 체코인이었으며 체코어를 모국어로 하고 일생 동안 체코어와 라틴어로 글을 썼던 사람이다.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역을 옛날부터 슬라브계 체코인이 살고 있던 땅이었으나 여기에 13, 14세기경에 독일 상인이 들어와서 이 지방의 금ㆍ은광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 이후 이 지방은 남부독일의 상인과 그들을 배경으로 한 독일 황제의 돈줄이었다. 그런 만큼 문화의 정도도 높아서 1348년에는 황제 카알 4세에 의해 이 지방의 수도 프라하에 독일 최초의 대학이 창설되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가장 유서 깊고 내용이 높은 대학으로서의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부와 문화는 완전히 독일인의 손에 지배되고 있었다. 광산의 경영자는 거의 모두 독일인이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다고 하던 보헤미아 본산사원도 모두 독일인의 수중에 있었다. 프라하대학은 볼로니아와 파리를 모방하여 학생자치조합을 만들었는데 그 조합의 단위단체는 국적별의 소위 네이션이라는 관계를 따른 것을 그 네이션을 독일인 학생은 3개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인은 하나를 만들게 해서 최고 의결기관인 네이션의 대표자회의에서 투표는 3 대 1로 독일인 학생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독일 자본과 여기에 편승한 독일인의 횡포, 특히 체코인을 종속국민화한 합스부르크 정권에 대항하여, 여기서는 일찍부터 반독일적인 민족운동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14세기경에 씌여진 [보헤미아 연대기]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보헤미아인이여, 독일인의 지배하에 종속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황제 카알 4세는 물론 보헤미아를 개발했다. 프라하 시를 확대하고 프라하의 학문과 문화를 향상시킨 점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도처에서 오직 독일인의 이익을 위한 일만을 했다. 보헤미아의 모든 도시에서 시장, 시평의회 의원직에 있는 자는 도대체 어느 나라 인간인가? 가로되 독일인이다. 사법관은 어떤가? 가로되 독일인이다. 독일인이 설교를 듣는 곳은 어디인가? 가로되 본산사원이다. 보헤미아인은? 가로되 교수사원의 앞마당과 민가다. 이처럼 모름지기 황제가 보헤미아를 제것이라 하고 보헤미아인을 멸망시키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확실히 보헤미아인은 황제 하에서는 의사당에서 하는 토론조차도 모국어로 하지 못하고 독일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반독일 운동의 기운은 이윽고 유명한 요한 후스의 종교개혁운동(1411)으로 폭발했다. 그리고 그것은 1414년 7월 후스가 살해된 뒤에도 계속되어 1419년 7월에는 프라하 시가 보헤미아인에 의해 점령되는 사건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카알 황제는 누차에 걸쳐 군대를 투입하여 이 반 카톨릭, 반독일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탄압 하에서 그들은 각지에 반 카톨릭적인 신앙단체를 만들어 저항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교단의 하나가 나중에 코메니우스가 최후의 지도자가 되었던 보헤미아 동포교단이다.
이 교단은 교육교화에 대단히 열심이었다. 16세기 초 무렵 온 보헤미아에 있던 다섯 개의 출판소 가운데 세 개는 교단이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요컨대 후스의 교의에 따른 교의문답서를 만들고 그것을 인쇄하여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다. 16세기 초 교단의 종교회의는 "자녀를 훈육하여 신앙심을 갖게 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다"라고 결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