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의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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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화랑도의 교육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화랑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신라의 인재양성 제도라는 측면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 고대 사회의 인재양성제도로는 고구려의 태학과 경당을 비롯하여 신라의 국학 등과 같은 학교제도를 들고 있으나 신라의 화랑제도 역시 학교제도와는 다른 형식의 인재양성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인재양성 제도로서의 화랑도도 나름대로는 일정한 조직체를 가지고 있으나 태학이나 국학과 같은 정형화된 교육체제라고까지는 말 할 수 없다. 화랑과 낭도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분명치 않고, 교육내용이나 교육방법 역시 학교교육의 그것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랑도가 그 시대의 인재양성 기능을 충실히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는 당대의 형식교육기관에 못지 않다 할 것이다. 특히 화랑도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교육사상, 교육철학이라 할 만한 교유한 이념적 배경을 지닌 인재양성 제도라 할 수 있다. 아울러 화랑도의 인재양성과 선발 방식은 당시의 형식적 교육기관들처럼 문사 위주의 양성, 문장 위주의 평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무를 겸전한 인재의 양성과 단체 활동 과정에 나타난 지도자적 재질을 바탕으로 선발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오늘의 인재양성과 인재선발 제도의 편협함을 되돌아보게 하는 면이 있다.
Ⅰ 인재양성 제도로서의 화랑도
「삼국사기」에서는 화랑도의 설치이유를 ‘처음에 임금과 신하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해 근심하였다’라고 함으로써 국가의 인재양성과 관련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처음’이 진흥왕대를 말하는 것인지 그 이전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이전과는 다른 인재양성 체제가 필요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어느 사회이건 간에 그 사회가 일정 이상의 조직과 형태를 갖춘 사회로 발전하게 되면 그에 따라 인재 양성제도를 갖추게 되는 것은 동서고금의 공통된 사실이고, 학교제도는 그러한 인재양성 제도의 대표적 형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신라사회에서는 골품제라는 것이 있어 그에 따라 사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당연히 국가의 인재도 이러한 골품제를 기반으로 하여 선발되었다. 그러나 사회 체제가 발전하자 골품에 의한 방식만으로는 인재선발과 운용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으나 아직 학교제도는 출현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랑제도는 기존의 골품제에 의한 인재등용의 한계를 보완해줄 새로운 인재선발 제도라는 의의를 지닌다. 물론 화랑 역시 기본적으로 귀족 자제들로 구성되는 한계가 없지는 않으나 단지 골품 자체에 의해 선발되는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다. 즉, 화랑제도는 단지 인재선발 제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재의 양성제도를 겸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인재양성을 위한 나름대로의 양성과정이 있었다는 것이 이전의 방식과는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 인재양성과정의 목표
기록에는 이런 교육과정을 통해 그 사람의 바름과 그름을 알게 되었고, 그 가운데 바른 자를 택해 조정에 인재로 천거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 사람의 바름과 그름을 알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품을 알았다는 것이다. 실제 임신서기석에,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은 같이 하여 기록한다. 신 앞에 맹세하기를, 지금으로부터 3년 후에는 임금께 충성의 도를 지켜나갈 것을 맹세하고 허물이 없을 것을 다짐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신께 큰 죄를 받을 것을 맹세한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임금의 신하로서 국가가 바라는 충성스런 인재가 될 것과 허물이 없는 좋은 인품을 갖추는 것이 당시 화랑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2) 배움의 과정
화랑도의 교육과정에는 우선 ‘도의 연마’의 과정이 있었다. 이 도의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화랑도 성립 이전의 신라 사회가 무속적 사회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제천과 같은 신을 섬기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유교가 도입된 것을 생각한다면 효제충신과 같은 유교적 덕목을 닦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임신서기석에 “≪시(時)≫ ≪서(書)≫ ≪예(禮)≫와 같은 유교 경전을 3년간 공부하기를 맹세하였다”는 것도 도의 연마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의는 또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와 같은 신라화 된 계율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화랑도가 미륵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 이후에는 미륵사상에서 강조하는 불교 계율과 같은 것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어떤 것이든 화랑도가 도의의 연마를 중시했다는 것은 화랑도가 단순한 무사집단이 아니라 정신적 도야를 무엇보다 중시한 이념 단체였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정신 도야를 통해 훌륭한 인품의 바탕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화랑도의 교육과정에는 도의의 연마와 같은 엄숙한 내용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악의 상열’과 같은 정서 도야도 들어 있었다. 여기서의 가악도 단순히 먹고 마시며 즐기는 가악이 아니라 종교 의식에 필요한 음악이나 화랑도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향가와 같은 노래로 생각할 수 있다. 낭도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흠모해 지은 나 충담사가 지은 를 보면 화랑의 교육이 단지 화랑과 낭도의 지배와 복종의 엄격한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따뜻한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간 봄 못오리니 계시지 못해 우올 이 시름,
두덩을 밝히오신 모습을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눈 돌림 없이 저를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낭이여, 그릴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다북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죽지랑이 화랑일 때 득오는 그 아래에서 낭도로 있었던 사람이다. 세월이 흐른 후, 간 봄을 그리워하듯이 득오는 죽지가 그리워 운다고 하였고, 낭의 모습을 좇아 저승에라도 가고 싶은 마음을 노래로 담아 나타내었다. 득오는 자기 고장 모량리를 다스리는 익선에게 매여 창고지기를 하고 토지 경작도 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신분의 득오가 이러한 노래를 지었다는 것은 낭도와 화랑의 인간적인 관계도 말해주지만, 그가 낭도로서 가악과 관련된 교육도 받았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게 해준다.
다음으로 화랑도의 교육과정에는 ‘유오산수’가 들어있다. 이 ‘유오’는 하릴 없이 산수 유람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심신수련의 방법이다. 그들이 유오한 곳은 명주, 동해의 정제, 총석정의 사선봉, 금란굴, 삼일포의 석감과 사선정, 영랑호, 경포대, 한송정, 월송정 등지로 알려져 있다. 삼국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경지대를 다니며 상무적인 기상을 길렀다고 볼 수 있다. 또 종교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화랑의 수련지는 빼어난 명승지이며, 무속이나 선가, 도가 계열에서는 이런 곳에는 신들이 임재하는 곳이라 보았다. 따라서 이 유오산수는 육체적인 훈련의 과정이기도 하였지만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화랑도 교육과정의 특성은 이러한 다양한 내용의 도야 형식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도야를 담당하는 사람과 도야를 하는 방식에서도 다른 교육과정과는 차이가 있다. 대체로 남도들을 지도하는 사람은 외부 사람들도 있었고, 내부 사람들도 있었다. 외부사람은 원광법사와 같은 사람을 들 수 있겠다. 원광법사는 수나라에 유학을 가있다 신라왕의 요청을 받아 귀국하여 귀산과 추항과 같은 화랑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세속오계를 주었다. 승려 가운데 월명사(생몰년 미상, 경덕왕 때 승려)와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국선지도라 하였고 동시대의 충담사는 찬기파랑가와 같은 화랑의 노래를 지은 것으로 보아 승려들은 외부, 내부에서 화랑과 낭도들을 지도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낭도의 교육을 이끈 주된 사람은 외부 스승들이었다기보다 화랑과 낭도 자신들이었다. 기록에서는 누가 지도했다는 말보다 ‘서로 닦았다’, ‘서로 즐겼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서로’라는 말은 외부의 스승에 의한 학습이 아니라 조직 내부의 자발적인 학습이었다는 말이며, 임신서기석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인간적 관계에 의한 자발적 학습이 이루어졌기에 화랑과 낭도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고 했다. 이는 국가가 화랑도를 설치한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국왕을 보좌할 어진 재상과 나라를 지킬 용기 있는 장졸들이 이를 통해 길러졌다면 그것으로 국가가 새로운 인재양성 제도를 도입한 목적은 달성되었다 할 수 있고, 화랑과 낭도들이 그 조직이 와해된 뒤에도 서로서로를 잊지 못해 추모의 노래를 지어 부를 정도였으므로 그 교육은 훌륭한 교육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인교육의 이념은 근대교육의 이념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종 황제가 1895년에 교육입국의 조서를 반포할 때, 특별히 덕과 체와 지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전인교육을 말한 바 있다. 덕육(德育)을 통해 “풍교(風敎)를 부식(扶植)하고 인세(人世)의 질서를 유지하여 사회의 행복을 증진해야 할 것”이라고 했으며, 체양(體樣)을 통해 “동작에 항상됨이 있고,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써 주를 삼고, 안일과 나태를 탐하지 말며, 고난을 피하지 말고, 너의 근육을 단단하게 하고, 너의 뼈를 굳게 하며, 강장(康壯)과 병이 없는 즐거움을 향수해야 할 것”이라 했고, 지육(智育)을 통해 “한 몸의 사사로움을 영위하지 말고 공중의 이익을 힘써 도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고종의 이 조직은 우리 근대교육의 방향이 전인교육이어야 함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근대교육이 도입된 지 100년이 넘은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을 한 번 보자. 덕육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머리와 입의 교육으로만 그칠 뿐 실천하는 교육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체육은 지식교육에 밀려 설자리를 잃은 지 오래이다. 교육과 역사의식 수업시간에 읽어봤던 교육칼럼 ‘졸라맨과 가분수 교육’의 내용에서도 교육관의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하고 가분수 교육을 버려야 명량한 교육미래가 온다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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