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인의 인권복지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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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혼혈인의 인권복지실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혼혈인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전적 해석을 붙이면 순수한 민족에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인 사람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 출생 동기나 부모의 국적에 따라 여러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혼혈인의 의미를 현재 혼혈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부 개념의 혼혈아 - 50년대 이후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 3세에 한정한다. 이러한 혼혈인을 아메라시안(Amerasian)이라고 부른다. 이 어휘는 현재 미국에 본부를 두고 7개국에 지부를 두어 사회사업을 벌이고 있는 펄벅재단의 창립자인 펄벅 여사가 만든 명칭이다. American + Asian에서 파생된 단어로도 금방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혼혈인들 중에는 미국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미군정이 실시되고부터 현재까지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는 이상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사회에 인식된 아메라시안의 존재는 1950년대의 전쟁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50년대 동란으로 미군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아이’라는 규정하에 전쟁 혼혈아를 1,500명 가량(82년 현재)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들은 호적상에 등록된 사람들이고 실제는 더 많은 혼혈인들이 사회의 냉대 속에 버려진 채 신음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전쟁 이후에도 혼혈인의 수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다 1982년도를 기점으로 현재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펄벅재단은 82년도 한국에 남아 있는 혼혈인을 4,000명으로 잡고 있으나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15,000명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94년 현재 보건복지부의 통계로는 한국내 혼혈인의 수를 600명으로 잡고 있고, 비공식 통계로도 1,500명을 넘지 않고 있다. 이렇게 혼혈인 수가 감소하는 이유는 대다수 혼혈인들이 미국으로 입양되거나 이민을 가고 있고, 외국인과 접촉하게 되는 여성들이 국제결혼 또는 혼혈아 잉태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들 혼혈인들은 아직도 아물지 않고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전쟁이 초래한 강간과 매매춘이라는 부정적 원인 외에도,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국제결혼이 현재 또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혼혈인의 이러한 태생적인 차이와 혼혈인이 처한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혼혈인 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되던 70년대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편향된 시각으로 혼혈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점이 혼혈인들을 여전히 차별과 고통에서 머물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뼈아픈 역사의 궤적 속에 태어난 혼혈아란 이름의 숱한 ‘미운 오리새끼’들이 피부색 등의 겉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아오고 있다. 같은 말을 쓰며 같은 땅에 살면서도 같게 느껴지지 않는 이들은 ‘피를 나눈 이방인’으로 취급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우리의 형제인 것이다.
2. 혼혈인의 유형
반 백인계, 반 흑인계, 반 필리핀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은 6.25 동란으로 인한 유엔군의 진주, 휴전후의 미군기지 주면의 기지촌 형성,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국제결혼의 급증 등의 요인에 의해서 혼혈인의 수가 점가 증가하고 있으며 그 유형도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1) 미군의 진주
제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곧 이어 또 다른 외국세력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9월 8일 하지(Hodge)중장의 지휘아래 4만 5천명의 미군들이 한반도 38선 이남지역의 점령군으로 주둔하기 시작했다. 주한미군은 1949년 6월 29일 애치슨선언에 따라 500명이라는 숫자만 남기고 철수했으나 철군 1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 때는 32만7천명에 달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3만 5천 510명에 이르고 있다. 미군은 육, 해, 공군의 총 숫자가 180만명으로 미국본토에 130만명, 해외에 50만명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중 한국에 배치되는 미군은 평균 1년 단위로 근무한다. 미군사령부가 위치한 용산은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였을 때 1906년 4월부터 군용로 수용하고 군사시설을 건설한 곳인 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철수하였던 미군은 계속적으로 주둔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출생한 혼혈인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의 시기보다 월등히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1953년부터 현재까지 혼혈인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전쟁이 시작 된지 한달도 안 되어 UN군이 진주하면서 주한UN군사령부가 창설식을 가진 것은 1957년 7월 1일이었다. UN군의 일원으로서 전후에도 약 7만의 규모였던 주한미군이 1971년 2만명이 철수하고 점차적으로 감소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3만 3천여명의 전사자를 포함, 14만 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북괴군을 격퇴함으로써 한국과는 혈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후 한반도 주면의 정세에 따라 1976년 6월 처음 실시된 것이 팀스프리트 훈련이다. 이 훈련에는 1976년 한미 양국 4만 6천명이 처음 참가하였으나 해마다 그 규모가 늘어나 1990년에는 19만 5천명으로 늘었는데, 미국 현지에서 약 10만명의 군인들이 훈련을 위해 한국에 오가기도 하는 실정이다. 주한미군은 북한의 전쟁도발 억제들의 측면에서 한반도의 평화유지에 공헌하는 점도 있으나 기지촌 윤락여성과 혼혈인의 출생에 직접 원인이 되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음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2) 기지촌의 형성과 윤락여성
기지촌 윤락여성이 한국사회에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미군이 한국에 대해 군정을 실시하면서부터인데, 1950년 6.25 사변으로 인해 그 형태가 본격화되었다. 기지촌의 원래 뜻은 부대주면의 촌락을 의미하나 현재 한국사회의 기지촌이란 한국내에 있는 120여개의 미군기지(Camp) 주변의 마을 또는 도시전체가 주한미군들의 위한 사생활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곳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기지촌에 형성된 나이트 클럽, 양복점, 선물가게, 음식점, 잡화상회 등 기타 모든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으며, 이중 향락산업의 대표적 형태인 나이트 클럽이 기지촌 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고, 나이트 클럽 종사자의 대부분의 윤락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