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와선 교사회 봉사와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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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서 와선 교사회 봉사와 선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각 교회마다 사회복지를 원하는 사람을 조사해보니 90%가 사회복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5%정도 하고 있다. 사회봉사비를 붙여서 하고 있다. 사회복지를 안하고 있는 이유가 뭐냐? 예산이 부족하다. 복지목회를 해야 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을 때가 언제가 될까? 자기 스스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교회가 70%이다. 그러면 그 교회가 언제 남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도와주는 기회들을 잃어버린다. 살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피해가는 것이 익숙해 있다. 복음 전할 시간도 없다. 복음을 잘 전하면 사회봉사는 저절로 따라온다. 바뀌면 안된다는 인식이 있다.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교회는 사회의 구제기관이다. 신학적인 변화들보다는 사회복지 하는 큰 교회들, 사회복지 전공자들이 많이 생겼다. 사회복지 하는 교회들이 많이 생겼는가? 사회복지 하는 교회가 성장한다. 한국교회가 복지가 안하다가 교회 성장 때문에 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를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성장을 위해서 복지에 띄어들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많이 있을 것이다. 복지전문가가 아니라 성장 전문가가 복지를 하게 만들고 있고 개교회 성장을 위해 자본에 대한 계산, 교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하게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사회복지에 대한 생각. 영혼 구원만 외치는 시대를 넘어서야 한다. 전도하면 자연스럽게 된다. 교회는 사회의 구조가 아니다라는 의견에 우리 스스로 정립해야 하고, 종말론적인 시각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 사회복지가 소홀히 되었다. 복지신학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필요가 있고 사회복지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인식을 제대로 해야 한다. 사회복지에 대해서 사회복지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복지가 잘못되었고, 그 이유 중에 하나가 교회가 사회복지를 시작한 것이 맞는데, 이것을 언제 그만두지, 국가가 해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못사는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먹이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는 거지가 한 명 들어왔다고 경계하는 추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계들이 있다. 기독교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사회복지라는 시각을 시작할 때부터 이것을 언제 놓을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 자체는 2가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고 삶을 통하여 나눌 수 있는 것이다.
Ⅱ. 예수의 전거를 통하여 보는 개신교 사회복지 신학의 특징
- 선한사마리아 이야기
예수는 경제적인 가난한 자만이 아닌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누가 복지의 가장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는 가를 분명히 한다. 복지의 대상을 예수는 지금 우리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죽음의 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보고 복지는 이에 대한 교회의 무조건 적이고 즉각적이며 지속적인 도움이라는 것이다. 눅10:25-42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영생을 얻어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의 이웃을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사랑의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인 이웃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통하여, 예수는 지금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복지의 대상으로서의 “이웃”이라고 한다. 즉 복지는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가 돌보지 않으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살아가게 돕기라는 것이다. 즉 예수의 복지 사상은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이유로 지금의위기에 처한 사람을 외면 할 수 있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반 복지적 인물로 비판을 하고, 사마리라 사람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고정관념을 버리고 구체적인 응급적 조치만이 아닌 지속저깅며 끝까지 책임을 지는 도움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한다. 34-35절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라는 복지에 대한 구체적인 일과 요구를 자세히 소개함이 바로 이런 의도로 여겨진다. (210-211)
예수가 사회복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변화되는 상황 속에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디아코니아, 집사, 봉사자로만 잘못 해석하는 것을 써놓았다. 디아코니아는 말씀을 전하는 봉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어떻게 사역을 하였는가? 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기독교 복지 목회는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눠야한다. 이런 근거가 있다. 전 우주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쪽에 관심이 복지 목회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교회에 왜 등을 돌릴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어떤 관점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을까?
눅10:25-42. 예수는 어떤 분이었는가? 영생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하고,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 있다. 그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가? 내가 믿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이 정말 믿을 만해요 라고 해야한다.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예수가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영생을 주시겠다라는 이야기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세사람이야기. 거반 죽을 상태라는 것을 강조한다. 1)그길로 내려가다가 보고 피하고 2)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지나간다. 두 사람다 무죄형이다. 피하여 지나갔다. 3) 거기 이르러 보고 불쌍히 여겨라고 나온다. 도움이라고 출발하는 것은 보고 확인하는 것에 있다. 보고 불쌍히 여겼다라는 부분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 불쌍히 여겼는가? 죽어가기 때문인가? 이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이 있었다. 죽어가는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강도만난 사람들은 한정되어있다. 돈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지들이었다. 강도만난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내가 돕지 않으면 죽지 않을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망설일 필요가 없다. 남을 돕는 다는 것은 폼으로 하면 안된다.
기름, 포도주 등을 준비한 사마리아인이다. 의학적인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부비를 주었다. 한 달 있다 오겠다. 그런 것 까지 생각했다라는 것을 보면 사회복지라는 것이라는 것은 정말로 준비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야 되겠다. 사회복지라는 것에 대한 허락해 줄 수도 있다. 내가 지금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노하실 일이면 해야 한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목표가 있다. 이 사람은 적어도 강도 만날 사람을 도와서 살릴 만한 사람이었다. 준비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일을 시킨다라는 것이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자비를 베푼사람이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말씀이다.
내가 지금 돕지 않으면 죽을 사람인가? 내가 돕게 되면 준비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준비되어지지 않아서 못 도와주겠다는 것은 무관심하다라는 의미이다. 처음 개척교회 했을 때 사회복지라는 것, 그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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