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사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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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의 사대 정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상하게도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대를 꼽으라고 하면 조선시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의 외교정책이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이라는 국가는 처음 건국 과정에서부터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 국호를 정할 때부터 명으로부터 국호개정을 승인받아서 행했을 뿐 아니라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하여 건국한 조선왕조는 왕도정치의 구현과 중국과의 사대관계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했다.
불행하게도 고대에서 근현대로 올수록 주체성이 약화된 역사를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슬픈 생각까지 하게 된다. 예전에는 중국에서 모델을 나라 발전의 모델을 찾고 현재에는 미국에서 이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란. 우리의 독자적인 발전모델 설정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한 후 더욱 강조된 외교문제와 관련하여 세종의 정치에 대한 조사와 그에 대한 검토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작은 시도가 될 것이라 믿는다.
2. 세종의 사대정치
우선 조선 초기 중국에 대한 사대적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태조 1년 때의 조선왕조실록을 그 예로 살펴보자.
□ 태조 001 1년 12월 17일(계해) / 황제의 은혜를 사례하는 표문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우인열(禹仁烈)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남경에 가서 은혜를 사례하고 말 30필을 바치게 하였다. 그 표문은 이러하였다.“배신(陪臣) 조임(趙琳)이 중국 남경에서 돌아오매, 삼가 예부의 자문(咨文)을 받아 황제의 칙지(勅旨)를 삼가 받들었는데 훈계가 매우 간절했으며, 이내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락하시니, 신은 온 나라 신민들과 함께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황제의 도(道)가 널리 미쳐서 만물을 덮어 길러 빠짐이 없었으며, 천자의 큰 계획이 선포(宣布)되매 훈계가 이에 나타났으니, 마음에 맹세하여 느낌을 알며 뼈에 새겨서 잊기 어렵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소방(少邦)에서는 공민왕이 이미 죽은 뒤로부터 변고가 여러 번 일어나게 되었는데도, 신은 매양 사대(事大)에 전심(專心)하여 다만 절개를 지키기를 더욱 굳게 하였습니다. 이에 시세(時勢)의 위의(危疑)함으로 인하여 세상 인정(人情)의 추대에 힘써 따르게 되니,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어서 깊은 못도 얇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습니다. 조그마한 정성을 주달(奏達)하여 감히 황제의 궁궐에 전달되기를 바랐을 뿐이온대, 어찌 천한 사신[賤介]이 이르게 되매 특별히 덕음(德音)을 내리실 줄을 생각했겠습니까? 이미 천리(天理)에 순응할 일을 지시하시고, 또 흔단(端)을 발생하지 말라고 경계하시며 서로 왕래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여 먼 장래를 위한 계획을 장구한 세대에 도모하게 하시니, 비록 부모가 아이를 가르친 것이라도 그 대단한 친절에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도 감동하였으므로 다만 눈물만 날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대개 삼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큰 도량의 너그러움을 넓히시고 지극히 인자(仁慈)하신 덕을 미루어, 만물(萬物)이 모두 혜택에 젖었는데 조그마한 몸도 또한 성덕(盛德)을 입게 되었습니다. 신은 삼가 마땅히 게을리 함이 없고 일을 폐기(廢棄)함이 없이 봉강(封疆)의 지킴을 조심하고, 장수(長壽)하고 부유(富裕)하시라는 말로써 송축(頌祝)하는 정성을 배나 다하겠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상소하는 ‘사불가론’을 올렸다. 그 가운데 첫째로 내세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중국에 대해 사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왕이었다. 그렇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중국에 대해 사대적인 관계로 외교를 시작했으며 그게 지속되며 세종 때도 고명을 맞이하는 의식절차를 거친 후 정식으로 왕으로 임명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세종 003 1년 1월 6일(신해) / 고명 맞이하는 의식절차
예조에서 계하기를,“고명을 맞이하는 의식은 건문(建文) 3년 6월 11일에 정한 의주(儀注)에 의거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하므로, 그대로 따랐다.“기일에 앞서 유사는 장전(帳殿)을 서녘 들에 설치하되 남으로 향하고, 홍문(紅門)을 장전의 남쪽에 세우고, 임금의 악차(幄次)는 홍문 밖 동쪽가로 북에 가깝게 설치하되 남으로 향하고, 용정 욕위(龍亭褥位)를 장전의 중앙으로 북에 가깝게 설치하되 남으로 향하고, 향정(香亭)은 그 남쪽에 있게 하며, 사향(司香) 두 사람의 자리를 장전 밖에 설치하고, 임금의 배위(拜位)는 홍문 안에 설치하되 북으로 향하고, 백관의 배위는 임금의 배위의 후면에 설치하되, 서쪽을 윗자리로 삼으며, 정·종(正從)의 구별이 없고, 반열은 합하되, 위치는 다르고 겹으로 행진하며 사찬(司贊) 두 사람의 자리는 임금의 배위의 북쪽에, 인례(引禮) 두 사람의 자리는 사찬의 남쪽에 각각 설치하되, 동·서로 향하고, 임금의 지영위(祗迎位)를 홍문 밖에 설치하되 북으로 향한다. 또 왕궁 안에 황제의 궐정(闕庭)을 전(殿)의 윗머리 한가운데에 가설하고, 절안(節案)은 궐정 앞에, 고안(誥案)은 절안의 동쪽에, 인안(印案)은 절안의 서쪽에, 향안(香案)은 절안의 남쪽에 각각 설치하고, 사향 두 사람의 자리는 향안의 좌우에, 임금의 수사위(受賜位)는 향안의 앞에, 개독안(開讀案)은 전계(殿階)의 동북쪽에, 선독관(宣讀官)의 자리는 개독안의 북쪽에, 전고관(展誥官) 두 사람의 자리는 선독관의 북쪽에 각각 설치하되, 다 서(西)로 향하고, 임금의 배위는 노대(露臺)위에, 배신(陪臣)의 자리는 노대 아래에 각각 설치하되, 북으로 면(面)을 하고 위치는 다르며, 겹으로 행진하되, 평상시의 의식과 같으며, 사찬 두 사람의 자리는 임금의 배위의 북쪽에, 사례(司禮) 두 사람의 자리는 사찬의 남쪽에 각각 설치하되, 동서로 마주 향하고, 인반(引班) 네 사람의 자리는 여러 관원의 배위의 북쪽에 설치하되, 동서에서 서로 향하게 하고, 의장(儀仗)은 전정(殿庭)의 동서에 진열하고, 악부(樂部)는 여러 관원의 배위의 남쪽에 설치하되 북으로 향한다.이날에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의장을 갖추고 교외로 나가는데, 임금은 편복(便服)을, 여러 관원은 예복을 입는다. 임금은 악차로 들어가고, 사신이 당도할 때는, 여러 관원이 반열을 합하여, 임금의 지영위 뒤에 모여 서되 북으로 면을 한다. 인례는 임금을 인도하여 악차를 나와 지영위에 나아가고, 사신은 장전 앞에 당도하자 말에서 내려, 절고인(節誥印)을 용정 안에 둔다. 사례는 임금을 인도하여 배위로 나아가고, 여러 관원도 역시 자기 배위로 나아가고, 사향 두 사람은 향정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아, 한 사람은 향로를 받들고, 한 사람은 향을 받들고서, 세 번 향을 올린 다음 물러나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임금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마치되, 임금이 절할 적엔 사례가 절차를 창하고, 여러 관원이 절할 적엔 사찬이 창한다. 용정자(龍亭子)가 나가면, 향정 및 악대(樂隊)가 앞서 인도하고, 사향 두 사람은 향정의 양 옆을 시종하여 계속 향을 올린다. 용정자가 길을 떠날 적에는 동으로 향하고, 여러 관원이, 문관은 왼편으로, 무관은 오른편으로 향정 앞에 갈라 서서 앞을 인도하며, 사신은 말을 타고 용정의 뒤를 따르며, 임금은 사신을 따라 동행하되 동으로 향하고, 잠깐 멈추어 여러 관원의 말 타는 것을 기다려서 행차한다. 왕궁 문밖에 당도하면, 여러 관원은 먼저 말에서 내려 좌우로 갈라 서고, 용정이 문에 당도하면, 정사(正使)는 절(節)을 들고, 부사는 고인(誥印)을 받들고 중문으로 들어와 정전에 당도하여, 각각 미리 마련된 안상에 놓고, 정사는 동에서 서를 향해 서고, 부사는 서에서 동을 향해 서고, 임금은 왼편 문을 경유하여 행렬을 따라 노대 위로, 여러 관원은 노대 아래로 각기 배위에 나아간다.사찬이 ‘국궁(鞠躬), 사배(四拜), 평신(平身)’이라고 창하면, 임금과 여러 관원은 다 몸을 굽히고, 풍악이 시작되면, 네 번 절하고 몸을 바로 한다. 음악이 그치면, 선독관(宣讀官)과 전고관(展誥官)은 동계(東階)를 경유하여 전(殿)에 오르고, 임금과 여러 관원은 다 꿇어앉으며, 사향은 세 번 향을 올린다. 부사는 고명을 선독관에게 주면, 선독관은 꿇어앉아 받고, 전고관은 마주 앉아 펴 놓으며, 선독이 끝나면, 선독관은 고명을 받들어 안상에 두고, 사찬과 인례는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바로 하라.’고 창한다. 인례는 임금을 인도하여, 서계를 경유하여 향안 앞에 나아가 북으로 면을 하고 섰다가, 인례가 ‘꿇어앉으라.’ 외치면, 임금은 꿇어앉고, 여러 관원도 다 꿇어앉는다. 부사가 고명을 받들어 임금에게 주면, 임금은 무릎을 꿇고 받아 좌우에게 준다. 끝난 후 인례와 사찬이 ‘세 번 머리를 조아리라.’고 외치면, 임금과 여러 관원은 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리며, 그 다음에 부사가 인을 받들어 임금에게 주면, 임금은 무릎을 꿇고 받아 좌우에게 주고, 인례와 사찬이 ‘세 번 머리를 조아리라.’고 하면, 임금과 여러 관원은 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리며, 인례는 ‘일어나 몸을 바로하라’고 한다. 인례는 임금을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와 네 번 절을 한다. 사찬이 절차를 부르면, 여러 관원은 다 네 번 절하고 몸을 바로 한다. 풍악이 그치고 행례를 마치면, 임금은 인례의 인도를 받아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갖추고 나와 향궐배(向闕拜)를 거행하되, 대조회(大朝會)의 의식과 같이 한다.”하였다.
여기까지 보면 세종의 국제정치도 ‘대왕’이라는 칭호가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큼 그다지 우수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대관계는 이념적으로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문화적 관계이지만, 현실에서는 힘에 기초하고 있었다. 아무리 세종이라고 하더라도 조선의 국력으로 중국이 요구하는 사대관계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이 국제정치에 대하여도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세종은 고려말과 태조대의 외교적 실패를 교훈삼아 태종과 세종은 대중국 관계에 정성을 기울였다. 또한 사대관계는 신중을 거듭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국익을 위해 때로는 중국을 속이기도 했다. 이러한 외교정책
참고문헌
5. 참고자료
세종의 국가경영(수업교재)
아직도 사대주의에(전통문화연구회, 박정진저 1994)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사대주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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