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남한 통치 토지 혁명과 사회경제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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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의 남한 통치 토지 혁명과 사회경제 변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북한이 남한을 남침한 이유중에는 통일을 이룸으로써 남한인민을 해방시키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해방의 초점은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보기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였던 남한 리더십으로부터 인민들의 정치적 해방이었고 또 한가지는 반봉건적 지배의 핵심 제도인 지주-소작관계로부터의 농민의 해방이었습니다.따라서 당연하게 통일의 내용에는 사회경제의 제도를 북한과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 또한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은 1949년 5월9일 남한의 토지개혁을 담당할 기관인 “공화국 남반부의 토지개혁 실시를 위한 법령기초위원회”를 구성하였을 뿐만아니라 을 통하여 이 사실을 공개하여 남한의 좌파들에게 머지않아 북한주도로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이 실시될것임을 암시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남한에서도 북한에서 실시한것과 똑갛은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논선들이 이어졌습니다. 6월초 벌써 법령의 초안이 작성되어 심의중이라는 보도가 잇달았습니다. 이것은 1946년 북한에서 실시했던 토지개혁, 이른바 북한형명을 남한에서 재연하려 한것임은 강조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법령과 제도의 기준은 북한에서 실시된것들을 남한에서 복제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토지개혁 정령의 공포에 즈음하여 7월8일 전농은“2천4백만 농민을 대표하여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결의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경기도 포천의 농민 이춘용은 “우리 농민들은 몇백 몇천대의 역사를 두고 자기가 경작하는 땅을 찾기 위하여 지주들의 무제한적 소작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투쟁하여 왔다”면서 “정령은 참으로 우리들 전체 농민들의 요망과 일치된다” 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저러한 표현속에서 토지문제애 대한 농민들의 열망을 읽을수 있게하였습니다.
신문들은 연일 토지개혁에 대한 전체인민들의 감격과 환호작약 하는 모습을 보도하였습니다. 실지로 토지를 분배하여 농민들 지지를 창출하는 것은 전시정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토지개혁과정에 참여하면서 김일성과 북한체제에 대한 지지를 요구받았고 결의하였으며 인민위원회 선거에의 100%가까운 투표참여율과 지지를 통해 만장일치로 자발적인, 또는 강요된 의사를 표출하였습니다.
정령에 따르면 토지개혁의 원칙은 북한지역에서 실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상몰수 부상분배 였습니다. 정령은 또한 미국과 이승만 정부가 소유하였던 토지는 전부 몰수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조신인 지주와 계속하여 소작주는 자의 토지도 역시 전부 몰수 하였습니다. 소작제도는 영원히 폐지하며 소유상한을 20정보까지는 몰수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정령이 발표된뒤 곧바로 북한 정부의 농림성에는 ‘남반부 토지개혁 지도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한가지 중요한점은 각 단위의 사업은 철저하게 상급단위에서 책임지도하였 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도 전체 사업의 책임은 중앙에서 파견된 1명의 전권위원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중앙파견 조직책임지도원의 보좌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앙이란 농림성 남반 토지개혁 지도위원회를 말하는것입니다. 다음으로 군전체 사업지도를 책임지는 것도 역시 중앙파견군책임지도원 2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군 실행위원회의 조직, 군 강습조직 및 지도검열사업 등 토지개혁에 관한 군 전체사업을 책임졌습니다.
2. 전쟁과 농민과 현물세제
전시에 농민이 토지로부터 생산한 작물을어떻게 징수할것인가? 무상 몰수 무상분배와 맞들린 제도로서 전쟁 중 북한은 남한에서 이른바 현물세제를 실시하였습니다. 북한혁명을 성공시킨 후 전전 북한에서의 현물세제 징수실적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곡물은 100.8% 면화101&등 다영한 초과 달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시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미 북한은 현물세제의 실시에 앞서서 전쟁중의 식량문제가 나아지지 않자 이 문제의 중요성을 반영하여 7월26일 내각결정 141호로 양정국장 권영태를 면직시켰습니다. 봄과 가을의 본격적 식량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을시 초기 국가의 식량문제를 총괄하는 내각 양정국장을 면직하는 것은 식량문제가 매우 심각했음을 반영합니다. 양정국은 농림부 소속이 아니라 내각 직속이었습니다.
북한의 내각 양정국이 8월25일 직접 전국 시도에 내린 현물세 징수준비에 관한 지도서에 따르면 통일된 양식으로서 도 군 면 별로 곡물종류에 따라 예상수확고와 징수예상량을 보고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미군의 공습 때문에 수납장소의 징수량은 2천가마에서 5천가마 사이를 초과 하지 못하엿습니다. 한곳에 집중하여 보관했다가 받으면 피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수납장소는 공슴을 피할 수있도록 철도역 교량 및 공장소지로부터 2km 이상 떨어져야 하며 민가로부터도 500m 이상 떨어져야 했다. 또한 농민들의 현물세 납부방법은 개별납부나 리 납부대표가 부락현물세를 공동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매 수납장소에는 국가검사원이 1명씩 배치되어야 했다. 국가양곡창고를 주야로 보위하는 자위대를 배치하였습니다. 현물세 부과사업은 매 농호별 작물별 수확고판정이 끝난 후 즉시 현물세 부과대장을 작성하고 이에 의하여 납부통지서를 발행하여 배부하였습니다. 현물세는 리동단위로 징수하였습니다.각급 인위장은 자기직속상급자에게 징수현장에서 구면으로는 매일, 구면에서 5일에 한번, 도에서 중앙 으로는 5일에 한번 씩 징수내용을 보고하여야 했습니다.
현물세 부과사업은 정확한 ‘농장물 실수확고 판정에 근거하여 실시하되 할대신에 다만 상부 예산에 맞추어 활당부과’하였습니다. 또한 조기작물 징수에 있어서 8월25일 현재 전체로는 1949년에 비해 127.4%의 중수를 보으나 소채,과실 등은 증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무계획성과 푱시와 같은 안일성, 전쟁승리에 도취한 허영이 신랄하게 지적되었습니다. 현물세 징수의 기한전 완납과 완벽한 보관은 특히 ‘공화국 인민군대 및 근로인미들의 식량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하여’ 충분하였습니다.
내각은 조기작물 현물세를 징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1950년 9월5일 이전까지 징수를 완료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대곡,건채,건과는 10월 20일까지 완료할 것을 지시하고 특기할 것은 만기 소채와 과실의 현물세는 예납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직,수확하지 않은 농산물을 미리 그 수확량을 산정하여 그에 해당하는 현물세를 납부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현물세 징수장소 및 보관 장소에는 방공호가 설치가 지시되었으며 방화용수를 저장하고 방화도구도 완비하라고 지시하엿습니다. 적기공습 때문에 사용불능한 기설 양곡창고보다는 유휴창고와 가설창고의 이용이 권장되었습니다. 징병으로 인한 농촌 노동력의 부족은 심각하엿는데 부족한 농촌노동력은 도시민 부녀자 학생들로 하여금 농촌지원을 나가게 함으로써 보충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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