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朴龍來 작가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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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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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박용래는 1925년 충남 논산군 강경읍 본정리에서 소지주이면서 유생인 朴元泰와 金正子의 3녀 1남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는 위로 누이 셋을 둔 남자아이로 집안의 기대와 지지를 한 몸에 받는 다재다능한 성품으로 성장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경상업학교에 진학하면서 미술에 특기를 보이는가 하면 학교 대표 정구 선수로, 혹은, 대대장으로 학생들을 통솔하기도 한 모범적 학생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바로 위 누이 鴻來의 죽음은 박용래의 심리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작가 이문구는 박용래와 홍래 누님과의 사이를 ‘동기 이상의 이상적 여인상’ 이라고 적었다. 이문구.『박용래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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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는 중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규격화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은행원이나 교사의 책무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다. 1965년 이후 그는 평생을 직장 없이 살았다.
박용래가 시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1946년 2월 대전 중심의 ‘향토시가회’가 발간한 동인지 『동백』에 최초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해방 이후 박용래 시인이 살았던 대전에서의 아나키즘적 분위기와 김남천, 한설야, 오장환 등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문학가 동맹에 가담하였다. 해방기 대전에는 세풍, 현대 신성 같은 잡지의 영향으로 아나키즘적 분위기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박용래의 그에 얼마간 경도하기도 하지만 김남천, 한설야 등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이내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 그러나 그것은 줄곧, 시인 박용래의 삶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작용하게 되고 그의 세계 인식을 가로막는 핵심적 관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이에의 체험 또한 지속되는 냉전시대에 그의 시적 정조로 하여금 한을 포유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주요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은봉. 「박용래 시의 한과 사회 현실성」, 『시와시학』창간호, 1991
공인된 문단활동은 1955년 박두진의 추천으로《현대문학》지에「가을의 노래」, 1956년「黃土길」,「땅」을 발표하면서 시작한다. 그 후 1969년에 첫 시집 『싸락눈』(삼애사)을 발간하고, 1975년에『강아지풀』(민음사), 1979년에『백발의 꽃대궁』(문학예술사) 등 세 권의 시집을 발간한다.
1980년 작고 후, 간행 시집들에 포함되지 않은 시편들을 포함한 시전집 『먼 바다』(창비)와 산문집『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문학세계사)이 간행된다.
그러나, 박용래의 시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9년「저녁눈」으로 《현대시학》 제정 제 1회 작품상을 수상하면서부터이다. 이 때부터 박용래의 시작활동도 두드러지고 그에 대한 평론가들의 관심도 높아진다.
박용래는 1980년 11월 심장마비로 별세하였고 충남 대덕군 산내면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2. 시적 경향
박용래는 가장 전형적인 향토적 시인, 정한의 시인, 눈물의 시인, 과작의 시인, 각박한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진 시인 등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