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론 - 생애와 활동, 작품의 경향과 변모,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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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화론 - 생애와 활동, 작품의 경향과 변모, 문학사적 의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임화(林和)」론
1. 생애와 활동
1908년 10월 13일 서울 낙산 밑 소시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제관계 및 기타 가족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본명은 인식(仁植), 필명은 성아(星兒), 임화(林和), 청로(靑爐), 김철우(金鐵友), 쌍수대인(雙樹臺人) 등이다.
1921년에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이상, 김기림, 윤기정, 조중곤 등과 사귀었고, 1925년 모친의 사망과 파산 등으로 보성중학 중퇴. 학교 중퇴와 함께 당시 유행한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급진적인 모더니즘 계통 시에 강한 매력을 느낌기 시작한다. 1926년에 『매일신보』, 『조선지광』를 통해 「무엇 찾니」, 「抒情小詩(서정소시)」, 「鄕愁(향수)」, 「지구와 박테리아」 등의 시와 , 등의 평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1927년경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1925년 8월 결성된 한국 최초의 전국적 문학 예술가 조직이다. 이들의 초기 활동을 흔히 신경향파 문학 혹은 자연 발생적 프로 문학으로 부르며, 이 시기의 주요 작가로는 최서해, 이기영, 이익상, 주요섭, 이상화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다가 1926년 준기관지 성격의 ‘문예운동’을 발간하면서 자연 발생적 단계에서 명확한 목적의식적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1931년 조선 공산당 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11명의 동맹원이 체포되는 ‘카프 1차사건’과 1933년 ‘신건설사 사건’으로 이기영, 한설야 등 23명의 동맹원이 체포되는 ‘카프 2차사건’을 겪으면서 급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결국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 라는 유명한 전향문을 쓴 박영희와 백철 등이 조직에서 이탈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직접적으로 해산 압력까지 받은 지도부는 1935년 카프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해체하였다.
에 가입하였으며 임화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예술운동』 1927년 11월, 카프 동경지부인 ‘예술동맹’에서 발행한 잡지
창간호에 그의 최초의 프로시에 해당하는 「曇(담)-1927년」 을 발표하였다. 그 뒤로 영화 평론과 영화 제작, 영화의 주연으로도 참여하였으며 박영희의 비호 속에서 카프의 중앙위원으로 임명 받아 조직 활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29년에 , , 와 같은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를 발표하면서 계급 문학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고 경향시가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해 박영희의 도움으로 영화공부를 위해 동경에 가서 이북만이 주재한 무산자사(無産者社) 계급문예운동의 정치적인 진출을 목표로 설립한 합법적인 출판사로서 『예술운동』을 발행하던 ‘예술동맹’이 1929년 ‘무산자’로 바뀌었다.
일을 돕는 한편, 신진기예의 계급운동자들인 김두용, 김남천, 안막, 한재덕 등과 깊이 사귀게 된다. 1930년에 「시인이여 일보 전진하자」(『조선지광』)를 발표하며 볼셰비키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고, 동거 중이던 이북만의 누이동생 이귀례와 결혼하여 1931년 함께 귀국한다.
1931년 귀국 후, 김기진, 박영희와의 이론투쟁을 통하여 조직을 장악. 안막, 김남천, 권환 등과 손을 잡고 구카프계를 전면 후퇴시킨 다음 카프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한다. 그 해 카프 1차 검거 사건으로 박영희와 더불어 약 3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되고, 1934년(27살) 카프의 맹원에게 2차 검거의 선풍이 몰아닥친다. 이 때 지병인 폐병으로 연행 도중 쓰러져 구금, 투옥은 면했으나 이듬해인 1935년(28살)에 카프 해산계를 종로경찰서에 제출하고 경남 마산으로 요양을 떠난다. 이곳에서 지하련을 만나 재혼을 한다.
1936년 중기의 임화 시를 대표하는 작품들인 「海峽(해협)의 로맨티스트」, 「달밤」, 「敵(적)」등을 발표하는데, 이들 작품에서는 카프시대의 목적의식과 계급주의가 드러나지 않는다. 1937년에는 요양생활을 끝내고 10편에 달하는 시와 10편에 달하는 비평을 발표하고 사실주의적 창작방법을 내세운다. 1938년 를 설립하였으며 『현해탄』이라는 최초의 시집을 출간한다. 1940년 일본 국군선전영화에도 가담했으며, 조선영화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조선영화연감」, 「조선영화발달사」를 집필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즉각 를 발족시키고 이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는가 하면 다음해 2월에는 전국문학자대회를 개최하고 (약칭)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좌익 계열의 문학 단체가 상대적으로 온건한 와 강경파가 중심이 된 으로 양분되면서 두 단체의 통합 움직임이 일었다. 조선문학가동맹은 1945년 12월 6일에 두 단체가 통합 성명을 내면서 가칭 조선문학동맹으로 결성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잔재의 소탕, 봉건주의 잔재의 청산, 국수주의의 배격, 진보적 민족 문화의 건설, 조선문학의 국제문학과의 제휴를 5대 강령으로 하고 해방 이후 활동하다가 미군정의 좌익 계열 탄압으로 인해 주요 인물들이 소군정 지역으로 속속 탈출하면서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제1공화국 수립으로 분단이 확정된 뒤에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문인들은 대부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으며, 남은 사람들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