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의 역사3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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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는 7세기 중엽의 아랍계이슬람 제국의 지중해세계로의 쇄도로 인해 본격적으로 충돌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충돌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이슬람교 측의 선공 이후 기독교 측의 반격, 이슬람교 측의 재공격과 기독교 측의 재반격의 형태로 공격과 반격의 유형을 연출해왔다. 현대로 넘어온 이후에도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해묵은 투쟁과 오감,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계 이슬람국가들 사이의 4차례의 걸친 전쟁, 그리고 발칸반도에서의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섬멸전 등 두 세계의 충돌의 끝을 가늠할 수 없게 한다. 두 세계 사이의 역사적인 충돌은 결국 서로 자기 신앙체계의 절대적 진리를 과시하고 우위를 확실히 하게 위한 투쟁 즉, 여호와와 알라가 유일한 신임을 확인하고 확인시키기 위한 힘 겨루기였다.
1. 아랍 이슬람세계의 기독교세계 선공(先攻)
무함마드가 세운 이슬람제국은 그의 사후 100여년 만에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인더스강에 이르고 서로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에 걸친 대제국을 만들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다. 당시의 지중해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중심지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나라가 지중해 해역의 지배권 내지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642년 알렉산드라아 점령 이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동 지중해 남부지역을 점령하고 지중해를 아랍인 자신들의 활동무대로 만드는데 이것은 지중해세계의 정치적 문화적 현상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켰다.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은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용이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의 사투로 국력이 쇠퇴함과 동시에 육전에 약한 비잔틴제국은 이슬람 세계와의 전투에서 매우 힘들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은 기독교도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만들었다. 이후에 이슬람 세력은 동지중해 해역에서 비잔틴 제국에게 퇴패 하며 알렉산드리아를 내주게 되지만 당시 아랍 총독 무아위야의 지휘 하에 해군력을 강화하면서 재탈환에 성공하게 된다.
이슬람 세력을 계속된 전쟁에서 성공을 이루며 북아프리카의 모로코까지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갔으며 이 지역에서 베르베르족을 굴복시킴으로써 이 부족을 중심으로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계속된 전진에 당시 유럽은 긴장 하였다 하지만 당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과의 전투에서 이슬람 세계가 패함으로써 더 이상의 유럽진출은 없게 된다. 이 당시 기독교세계는 각기 남쪽과 북쪽에서 압박한 이슬람세력과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유럽대륙에 완전히 갇혔을 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발휘한 문화 창조력도 거의 상실해 버렸다.
2. 유럽 기독교세계의 대반격
10세기 말 10세기 초에 이르러 중세 서양세계는 봉건제도하의 장원제도로 정치적 · 사회적으로 점차 안정을 회복해 갔고 경제적으로도 일부 잉여 농산물과 수공업품을 중심으로 교환이 이루어지는 등 상당한 수준의 성장을 이룩해 가고 있었다. 교황권의 신장과 더불어 기독교의 교세가 확대되었으며 그레고리우스7세를 거치면서 교황청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서양의 안정과 활기는 바탕으로 이슬람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한 반격을 준비한다. 기독교 세계의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교황 우르반 2세는 십자군운동을 발의한다. 1096년부터 1291년 까지 총 8차례 진행되었으며 이 전쟁은 1회 원정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데다 훈련도 받지 못한 대다수의 농민군들, 당시의 교통과 통신수단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먼 지역의 원정, 국왕과 대영주들의 참전이 초래한 지휘부의 갈등 등을 실패의 중요 원인이다. 이러한 십자군운동의 성격은 시간이 흐를수록 상업적 전쟁으로 바뀌어 2백여 년 동안에 걸친 전쟁을 통해 지중해는 다시 유럽인의 활동무대가 되어 지중해는 그들의 교역로로 부활하였다. 원거리상업과 동시에 내륙사장의 발달은 결국 유럽 초기 상업자본주의 사회로 이끌었다. 또한 그들의 동방물산에 대한 관심은 후에 콜룸부스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항해까지도 연결된다. 2백여 년의 걸친 대원정은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증오심을 증대시켰다. 십자군원정이 끝날 무렵 아랍의 지적 문화적 창조력은 서양으로 옮겨갔고, 서양은 약 1백여 년 후에 이탈리아를 필두로 르네상스문화를 발전시켰다.
3. 이슬람세계의 재공격
십자군 전쟁이후 셀주크 제국은 십자군 전쟁에 이은 몽골족의 침입으로 몰락하게 되고, 이어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가지게 된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453년 비잔틴제국을 정복한다.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운동으로 수난을 당한 후 3백여 년 만인 15세기 중엽에 다시 동유럽의 기독교 세력을 제압하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잡은 오스만 투르크족은 소아시아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오스만 투르크족을 크게 환영하고 그들은 각종 토산물과 지역 특산품을 공물로 바치며 오스만 투르크족의 발달된 농경기술을 전수받았으며 오스만 투르크족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은 이러한 안정된 세력을 바탕으로 티무르 제국을 물리치고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하게 된다. 이후 예니체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 투르크족은 비잔티움을 함락시키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비잔틴 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고,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주며, 비잔티움에 만들어진 그들의 문화를 모두 인정한다. 그리고 비잔티움을 이스탄불로 개칭하고 수도로 삼게 된다. 이어 오스만 투르크족은 도나우강 이남의 발칸반도 대부분을 장악한다. 이후 제국의 대제로 불리는 술래이만 치세에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장악하고 1529년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하면서 유럽기독교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하지만 원정의 제약과 유럽의 연합 전선으로 인해 물러나게 된다.
4. 가톨릭교 신성동맹과 오스만 투르크제국 응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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