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악보와 용비어천가

 1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악보와 용비어천가-1
 2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악보와 용비어천가-2
 3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악보와 용비어천가-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악보와 용비어천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훈민정음으로 만든 첫 작품은 용비어천가이고, 세종악보는 대부분이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삼고 있으므로,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그리고 세종악보 창제에 관련된 기록을 통하여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종 24년 3월 1일에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를 지을 준비로 경상전라도 관찰사에게 전지를 내린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25년 12월)보다 약 1년 9개월이나 앞선 일이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창제와 용비어천가 편찬의 준비가 적어도 세종 24년 3월 이전부터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용비어천가를 지은 사람은 권제정인지안지 등이고, 그 시기는 세종 27년 4월 5일이다. 그리고 국문가사로 먼저 짓고 한시로 해석하였다.
세종악보를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에 관련된 문헌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3) 세종악보 창제 관련 기록
ㄱ. “…世宗因鼓吹樂及鄕樂 創爲新樂 曰定大業 保太平 發祥 鳳來儀 今謹錄也”(세종실록 제 138권 서문(세종악보 제 138권 서문) : 국사편찬위원회 1956 : 447)
ㄴ. “…初上以龍飛御天歌被管絃 調其急. 作致和平. 醉豊亨. 與民樂等樂. 皆有譜. 致和平譜五卷. 醉豊亨. 與民樂譜各二卷. 後又作文武二舞. 文曰保大平. 武曰定大業. 譜各一卷. 又取瑞應. 別作一舞. 號發祥有譜一卷. 又定俗樂. 以桓桓曲曲維皇曲維天曲靖東方曲獻天壽折花萬葉熾瑤圖子小抛毬樂步虛子破子淸平樂五雲開瑞朝衆仙會白鶴子班賀舞水龍吟無動動井邑眞勺履霜曲鳳凰吟滿殿春等曲. 爲時用俗樂. 有譜一卷…“(세종실록 제 116권, 세종 29년 6월 4일 : 국사편찬위원회 1956 : 25)
(3ㄱ)에 따르면 세종악보의 신악(정대업, 보태평, 발상, 봉래의)은 세종대왕이 고취악과 향악에 인(因)하여 창제하였다. (3ㄴ)에 따르면 세종 29년 6월 4일,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를 관현에 올려 속도를 조절하여, ‘치화평, 취풍형, 여민락’ 등 음악을 제작하였고, 모두 악보가 있었다. 따라서 세종악보의 음악 용비어천가(여민락, 치화평, 취풍형)를 비롯한 여러 곡을 창제한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가 악곡의 가사로서 율려(음률)에 잘 어울리는지를 가늠해 본 첫 음악작품은 세종악보의 ‘음악 용비어천가’라고 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 창제과정에서 함께 준비되었지만,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에야 비로소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인지 꼬리글의 ‘악가’의 언급으로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에 악가 편찬 의도가 있었던 것이라고 볼 때, 그 악가는 용비어천가라고 짐작해 볼 수 있으므로, 용비어천가의 준비시기는 훈민정음과 같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앞의 2절에서 세종악보는 용비어천가와 함께 준비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므로, 세종악보의 창제 준비시기도 훈민정음의 준비시기와 같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세종 12년 음악정리 마무리 단계에서 황종률을 확정한 것이 음악의 표준음을 설정한 것이라면, 훈민정음은 말의 표준음을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성은 글자의 형태를 창안한 것뿐만 아니라, 28개의 표준음을 언어학적으로 변별하여 설정한 데에 있다. 말소리를 28개의 표준음으로 설정하고, 그 기호를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