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보면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귀(鬼)는 음지령(陰之靈)이고, 신(神)은 양지령(陽之靈)이라 하였다. 즉, 생물을 구성하는 본질은 음과 양의 두 기(氣)이며, 이 두 기의 영(靈)이 그 생물에서 떠나는 경우에 혼(魂) ․백(魄) ․정(精) ․신(神) 또는 귀신이 되고,
星湖, 李瀷, 1681~1763)은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로 평가받는 18세기를 살아가며 전통을 계승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읽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학문 탐구에 일생을 바쳤다고 평가된다. 그는 실학파의 대표자답게 다양한 분야에서 특출한 흔적을 남겼다. 17세기와 18세기 전반기에 살았던 대표적인
星湖)이며 본관(本貫)은 여주(驪州)이다. 그는 숙종 7년(1681)년에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부친인 하진(夏鎭)의 유배지였다.
여주 이씨 집안은 전부터 명문이었다. 성호의 8대조인 계손(繼孫)은 일찍이 학문으로 집안을 일으켜서 벼슬이 병조판서까지 이르렀다. 증조 상의(尙毅)는 의정부
星湖學派와 北學派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실학사상의 전개과정과 실학파의 계보
임진왜란을 거쳐 병자호란을 치르는 17세기 초기에 전통적 도학파의 일반적 관심이 禮學과 義理論에 집중되고 있는 반면 일부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의 경제적 내지 사회제도
星湖)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이다. 17세기 이후, 온갖 국가적 수탈 속에 화폐의 유통과 더불어 서울의 상업, 고리대 자본이 농촌에 침입해서 농민을 토지로부터 이탈시키고 농촌사회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당시의 광경을 농촌에서 일생동안 농민들과 더불어 몸소 체
이익 (李瀷)선생에 대해 (1681~1763)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 선생은1681년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나 그 이듬해인 선영이 있는 안산으로 와 평생을 안산에서 머물렸다.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여주(驪州). 자 자신(子新). 호 성호(星湖).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 낙방하였다. 유형원의 학풍을
Ⅰ. 서 론
세계 모든 나라와 각 지방의 음식문화는 각 개인의 식성과 선호도, 지역 간에 생산되는 생산품에 따라 독특하게 형성 되 있다. 여자가 남편을 따라 시집을 가게 되면 가장 먼저 시부모 및 시댁식구와 갈등을 일으킨 것 중 하나가 음식의 입맛에 맞고 맞지 않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옛말에
지식의 사회화가 없이 사상이 성립할 수 있을까
- 일본 실학에 비추어 본 조선 실학의 과학기술 -
오늘의 주제는, “실학의 현재성을 묻는다” - ‘과학기술분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 말씀을 먼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실학의 현재성’이라고 할 때, 저는 동아시아의 세계
실용학문(실학)의 대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1. 그의 생애
그는 1681년(숙종 7) 신유년 10월 18일 아버지 이하진의 유배지(流配地)인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호가 두 살 되던 1682년(숙종 8) 임술년 여름, 향년 55세로 귀양이 풀리지도 않은 채 그곳에서 세상을 버렸다. 이처
문학이 성장하면서 문학을 하는 자세와 방법에 대한 검토를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추세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평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났으면,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을 그 첫 예로 들 수 있다.
<파한집>은 시화를 모은 책이다. 일정한 체계를 갖추지 않고서 생각나는 대로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