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서 김억
Ⅰ 작가의 생애
평안북도 곽산 출신이다. 1907년 인근 정주군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
학지광>창간호에 시「이별」「야반」「나의 적은 새야」산문시「내의 가슴」「밤과 나」를 내놓고, 이어서 1918년 <태서문예신보>에 10여 편의 창작시와 서구 상징시를 번역 소개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지 <창조>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 7월25일 창간한 순수문예 동인지 <폐허>에 염상섭, 오
학지광>(1914), <태서문예신보>(1919), <조선문단>(1924)와 같은 문예학술잡지의 간행이 재개되면서 문학활동이 뒷받침 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고 일본 유학을 거친 지식층들이 외국의 문예사조를 공부하고 국문을 기반으로 하는 문필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과 작가들이 나타났다. 또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어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
자연주의 생성 배경에 기여할 수 있는 논문들
<구주사상(歐洲思想)의 유래>(필자 미상), 동아일보, 1922.3.10.∼6.22., 朴庸淮
<자연과학에 대한 인생관>, 개벽 3호, 1920.8., 林房雄
<과학과 예술>, 개벽71호, 1926.7., 金完熙
<유전의 힘>, 학지광 27호, 1926.5.
이 발표되어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조선인교원연맹을 조직 계획하였으나 피검됨.
1929.(22세) 도일, 동경제일외국어학원에 1년간 수학, 일본 문학, 서양문학을 탐독함.
1930. 동경 조도전대학 부속 제일고등학교 문과 입학
1931. 조선인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던 <학지광>의 편집에 참가. <조선시단>,<신계단> 등에 시와 단편
‘구제 사업’ 발표.
, 신교육, 남녀평등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는 잡지 소년에 발표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본다. 이 외에도 잡지 학지광, 청춘, 태서문예신보 등에 발표한 이광수, 현상윤, 최승구, 김여제, 김억, 황석우 등의 초기 시들이 신체시에 속한다.
2) 산문
학지광>에 대한 반감이 그 계기가 되었다. 주요한의 「불노리」는 한때 최초의 근대 자유시라는 평가를 받았고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을 넘어서는 소설 미학을 확립했다는 문학사적 위치를 점했다. 반면 전영택은 상대적으로 문학사적 위치가 낮게 평가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전영택 초기
학지광』 같은 잡지를 읽으면서 독학으로 문학 수업을 하고 이들 잡지에 투고도 하는 등의 습작기를 보냈다. 1918년 간도 등지를 유랑하면서 나무장사‧두부장사‧부두노동자‧음식점 배달꾼 등 최하층 생활을 경험하는데, 이 체험이 창작의 밑거름이 되었다. 1924년 초에 단편 소설 「토혈&
학지광》을 통해 시작되었고, 이후 1918년에 《태서문예신보》에서 본격화되었다. 1919년 이후 《창조》, 《폐허》, 《백조》 등의 동인지가 창간되면서 상징주의는 근대시의 중심 사조로 자리잡고 우리 시단에 그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20년대 시인들치고 상징주의 기류에서 벗어난 시인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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