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서김억

 1  안서김억 -1
 2  안서김억 -2
 3  안서김억 -3
 4  안서김억 -4
 5  안서김억 -5
 6  안서김억 -6
 7  안서김억 -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안서김억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안서 김억
Ⅰ 작가의 생애
평안북도 곽산 출신이다. 1907년 인근 정주군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의 제자로, 김억의 지도를 받았다. 1922년 김소월을 처음 문단에 소개한 사람도 스승 김억이다.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평양의 숭실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밖에도 에스페란토 보급에 앞장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김억은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도 벌였다. 작사가가 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생소한 예명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문단에서의 지위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작사한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고, 북조선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시집으로 번역 시집인 《오뇌의 무도》(광익서관,1921), 《신월》(문우당,1924)과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조선 도서,1923), 《원정》(회동서관,1924), 《안서시집》(한성도서, 1929), 《봄의 노래》(1925), 《먼동 틀 제》(1947), 《민요시집》(한성도서,1948)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번역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기록되어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Ⅱ 작품의 경향
1. 시인이자 번역가이자 비평가인 김억 한국 현대 시인 특성론, 문덕수 외, 2000, p.31~35
참고문헌
참고문헌
- 한국근현대문학사, 윤병로, 명문당, 1991.
- 안서시의 텍스트 연구, 김영미, 한국문화사, 2004
- 한국 현대 시론사, 이승훈, 고려원, 1993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최동호 외, 문학과 지성사, 2007
- 한국 현대 시인 특성론, 문덕수 외, 국학자료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