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의 세 신, 삼천의 무리, 삼칠 일, 인간 삼백육십여 사(事) 등. 이는 ‘삼’을 신성한 수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삼’은 한국의 민간신앙은 물론, 불교․도교․유교, 기독교와 서양 사상에서도 신성시하였다.
신물(信物)「단군신화」에서 환웅이 지상으
등오. 도복. 회덕 등의 남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육촌의 그 셋째의 것은 무산 대수천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구례마인데, 그는 하늘에서 이산으로 내려왔다. 이 우산 대수촌의 우두머리 구례마는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라고 하여 박곡촌 등의 서쪽에 있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으며, 1481년(성종 12년)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
김시습의 겸손의 뜻도 담겨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집착에 대한 탈피와 진정한 세계에 대한 큰 사랑의 덕목을 보여 주려는 의도로도 보여 진다.
위와 같은 내포적 의미를 살피면서 본 논문의 목적은 <金鰲新話>가 애정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점에서 다섯 작품 중 애정이 주를 이루고 있는 < 萬福寺摴蒲
이율곡은 김시습이 "성질이 굳세고 곧아 세속을 분개하여 심기가 답답하고 편안하지 못하매 스스로 세상을 따라 오르고 내릴 수 없음을 헤아린 나머지 드디어 그 몸을 내던져 세상밖에서 놀았다."고 하였다. 김시습 자신은은 "선비는 자신과 세상이 모순이 있으면 물러가 살면서 自樂하는 것이 대체로
받을 만큼 재질이 뛰어났다고 한다. 21세 때 삼각산 산사에서 독서하던 중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 하여 세상을 버리고 중이 된 이래 평생을 은자로 보냈다. 그는 일생 동안 현실과 이상의 갈등 속에서 살아왔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 같은 고민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김시습의 작품이며 원전은 한문소설이고 모두 다섯 편으로 되어 있다. 이 금오신화는 낙천 불우한 사상의 표현인 동시에 그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는 중국 교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였으나 그 인물이나 지리적 배경은 모두 한국적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최초의 고소설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금
문학적 관습을 받아들여 절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아직 소설 시대는 이르지 않았는데, 고독한 예외자의 선구적인 작품만 먼저 나왔다는 사정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책을 지어 석실에 감추어 두고 후대에 자기를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겠다고 했다는 말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사상을 소재로 하여 종교 간의 갈등이 아닌 융합의 미학을 구현하였고, 우의적인 소설로서 이상적 가정 사회의 가치관을 유감없이 표현해 내었다.
서포 김만중은 당대 지식인으로서 앞서가는 세계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혼천설을 극복한 서구의 지구관을 적극 수용하는 새로운 우주관을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