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도(울릉도)와 우산도(독도)라고
하였다.
그 뒤의 주요 관찬문헌인 고려사 지리지(1451년),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동국문헌비고 (1770년), 만기요람 (1808년), 증보문헌비고 (1908년) 등에도 독도의 옛 지명인 우산도를 적고 있어, 그 지명이 20세기 초엽까지 계속되는 것을 알 수 있다.
◉ 담양의 역사
담양(潭陽)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담양도호부조(潭陽都護府條)에 이르면 「본래 백제(百濟)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는데 신라때 추성군(秋成郡)이라 바꾸었고, 고려 성종 14년(995)에 담주도단련사(潭洲都團
Ⅰ. 내고장 탐구(우리고장 탐구)와 옹진군
옹진군에 있는 백령도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구려 때 곡도라 불렀고 고려 태조가 지금의 백령으로 고치고 현종 9년(1018)에 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6년(1357)에 해적들의 출몰로 주민들을 이
문자학 개론 개별과제
관심 있는 한자 3자 : 聞. 喜. 慶.
聞. 喜. 慶 세지를 선택한 이유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건치연혁조>에 문경의 고을 이름이 고려 초기에는 聞喜 공양왕 때 聞慶으로 개칭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라는 기록에서 聞. 喜. 慶. 3자를 따온 것임
聞 : 들을 문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 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장한상 울릉도사적기>를 펴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장한상 울릉도사적기>를 펴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장한상 울릉도사적기>를 펴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
역대정부의 독도 정책
독도가 우리영토 란 역사적 증거(1)
서기512년(신라 지증왕): 이사부에 의해 우산국이 병합 되었다. -『 삼국사기』
『세종실록지리지(1432년),동국여지승람(1481년),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만기요람 군정편(1808년)』에 우산국은 독도와 울릉도를 뜻한다고 나와있다.
1667년:일본 정
① 손곡산인(蓀谷山人) 이달(李達)은 자가 익지이고, 쌍매당 이첨(李詹) 이첨(李詹) : 1345~1405,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이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하륜 등과 함께『삼국사략』을 찬수하였으며, 소설「저생전」을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많은 시를
- 선덕여왕 때 첨성대를 세웠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 -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며, 속이 비어있어 그 속으로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다.
천문 관측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음
신증동국여지승람(15세기 말)
동사강목(1758)
일제 강점기, 와다 유지 - 근대인으로서 첨성대를 처음으로 천문대로 규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