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배경 공간으로 자리한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삼면에 바다여서 해양 진출이 용이했지만, 왜구의 침략과 중화사상으로 인한 중국 중심의 외교 정책 등 정치적 상황으로 조선조의 해양 활동에는 제약이 가해지기도 했다. 강력한 해금정책이 조선시대에 시행되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이
1. 머리말
『동사강목』은 조선후기 역사연구의 귀결점이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후대에 끼친 영향까지 고려할 때 더욱 그 그치가 돋보인다.
안정복과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동사강목』은 일찍부터 학계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 인식은 대체로 실학의 근대성이라는 개념틀에 의해 포괄되
『조선왕조실록』은 태조(太祖: 1392년 즉위)에서 철종(哲宗: 1864년 승하)까지 25대 국왕 472년간의 역사를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거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역사책이다.
『조선왕조실록』 은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내에서의 문화재적 가치를 이미 인정받은 셈이다. 그런
조선시대 인구변동 추이를 종합하여 보면, 15세기 이후 16세기 말까지는 꾸준히 증가하다가, 17세기 중엽까지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다시 1650년부터 1680년까지는 급격히 증가하다가, 그 뒤 19세기까지는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다. 서울의 인구도 이와 같은 전국의 인구변동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상의 세계를 지배한 강력한 세력인 불교 또한 새로운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무신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선종의 움직임은 문신귀족에 기반을 두고 발전했던 교종을 대신하여 불교계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지눌로부터 혜심 등으로 이어지는 무신란 이후의 보조선(普照禪)은
사해 보았다.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발전시킨 후기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정인보를 비롯하여 문일평, 손진태를 중심으로 그들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조사하였고, 그것을 통해 작게는 후기 문화사학, 크게는 후기 민족주의 사학이란 무엇인지, 과연 그것은 사학사적 입장에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적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의 동아시아 세계 침탈의 역사는 사실상 조선에 대한 합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에 대한 공식적인 합병 이전 일본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기점으로 국제사회에서 암묵적인 제국주의 세력으로 승인을 받았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동아
양자에 공통된 것이었으며, 그들의 민족주의사관은 관념적 성격이 강하였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역사학과 역사관을 토대로 그들의 민족주의사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한국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을 성립시킨 사학자로 평가받는 그들의 사학사적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론
『삼국사기』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역사학자들 및 세인들에게 사대적이라는 이유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기존의 『삼국사기』에 대한 관점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가해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