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열해 놓았고 우측은 의생활을 전시한 것이다.
송자대전 부록은 대표적인 대전의 인물인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문집인 송자대전 중 부록으로 송시열 선생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뽑아 건.곤 두권으로 만든 책이다.
이 사진은 농경문동기로서 청동기시대를 배울 때 교수님이 설명해주신 유물이다.
송시열, 송규렴을 배출하며 가문을 조선의 명문가 반열에 놓이게 하였다.
(2) 동춘당가의 진장
: 송준길은 17세기 송시열과 더불어 양송체라는 서체를 확립하였을 만큼 명필이다. 송준길의 서체는 한석봉의 석봉 체를 골격으로 삼아 여기에 웅건하고 장중한 무게와 기품을 더한 독특한 글씨체를 확립하
단식하다 목을 매달아 자결하려 했다가 이계(1603~1642)의 밀고로 심양에 끌려가 8년간 고초를 겪었던 척화론의 종주 김상헌(1570~1652)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내세워지고 이를 따르는 김집.송시열 등이 대거 등용되어 송시열(1607~1689)이 북벌론을 천명하는 ‘기축봉사’라는 비밀 상소까지 올리게 되었다.
것이다.
한편 고산은 이른바 예학의 대가라는 점에서 조선 왕조 학자의 계열에서 제외될 수 없는 인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의 주자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 놓고 당대 학문의 사종으로 추앙받던 송시열과 맞서서 오히려 송시열을 당혹하게 만들 만큼 고산의 예론은 철저했기 때문이다.
송시열, 송준길과 교유가 깊었다. 임윤지당의 고조 할머니는 정부인 상산 김씨로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상의 딸이었다. 윤지당의 아버지 노은 임적(1685~1728)은 26세에 소과에 급제, 벼슬을 하다가 당쟁이 치열해지자 그만 두고 충청도 청풍현의 노은 골짜기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당시 근처
송시열, 송준길과 교유가 깊었다. 임윤지당의 고조 할머니는 정부인 상산 김씨로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상의 딸이었다. 윤지당의 아버지 노은 임적(1685~1728)은 26세에 소과에 급제, 벼슬을 하다가 당쟁이 치열해지자 그만 두고 충청도 청풍현의 노은 골짜기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당시 근처
송시열의 노론과 남인과 화해하려는 윤중의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 기사환국 - 정권에 밀려난 남인들이 후궁 장옥정을 내세워 세력을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장옥정이 아들을 낳자 숙종은 세자로 정하고 종묘고묘까지 마쳤는데 서인인 송시열이 대놓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서인을 대거 축출
송시열의 사상을 신봉하고 특히 이이의 학설을 옹호하였으나 주리·주기의 양설을 모두 배척, 절충적 이론을 세웠다. 1882년(고종19) 유일로 천거되어 선공감감역이 되고 그 후 강원도 도사·장령·순흥부사 ·중추원참의 등에 보직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만년에는 전라도의 계화도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송시열, 이완, 송준길 등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효종은 꿈은 북벌을 준비하던 도중 효종이 사망함에 따라 묻히게 되었다. 야사에는 효종의 북벌론이 당시의 대소신료와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에 효종이 독살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즉 북벌론은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처지였
송시열이 지은 송자대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을 하였습니다.
북벌론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
서인세력을 중심으로 전개
우리나라는 실로 명 신종 황제의 은혜를 입어 임진왜란 때 나라가 이미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보존되고 백성이 거의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였으니 우리나라 나무 한그루와 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