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의 시조는 기교면에서 탁월하고, 특히 <어부사시사>는 시적 구성이 유기적으로 구조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시는 즉흥이라기보다는 주로 작흥에 의한 제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울러 그의 시조를 흔히 생활과 밀착되었느니, 또는 일상적이고 평범함 속에 아름다움을 찾는
(2) 홍기종 가옥[洪起宗家屋]
안채는 남향이며 안채의 서쪽으로 아래채가 있다. 안마당의 동쪽에는 광채가 있고, 남쪽에는 헛간채가 있으며 서쪽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 마당에서 2단의 석축을 쌓아 사랑채를 지었으며 그 맞은편에 5칸의 문간채가 있고 사랑 마당 남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사
호란과 소중화
포로가 된 왕자들
청군에 항복한 조선의 인질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잡혀감(1637)
심양일기, 심양장계
: 두 왕자의 심양체제, 당시 조청관계, 건국 당초의 청 왕조에 관해 보여줌
1637년 4월 ~ 1645년까지 8년의 인질생활
소현세자
외교 절충 책임자 역할
명 잔존세
1. 연구 배경 및 목적
1990년대 이후 관광과 축제라는 문화현상이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조명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관광은 지역의 경쟁력 확보는 물론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방안으로 대두되었다. 관광산업의 발전은 주 5일제로 인한 여가시간의 증가, 도로의 확
1. 왕권을 수호한 대비-정희왕후 윤씨윤씨는 1428년 열한살에 수양대군과 백년가약을 맺어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짐으로써 왕실의 여인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대군부인중 한명에 지나지 않았던 윤씨는 소헌왕후 심씨가 그랬던 것처럼 국모가 될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그
해남 땅으로의 여행, 거기서 만날 녹우당, 미황사, 그리고 보길도, 다산 초당, 영랑 생가... 특히 해남 보길도. 땅끝마을에서 노화도를 거쳐 한 점 섬으로 바다에 떠 있는 유토피아. 그리고 그 지상낙원을 건설한 고산 윤선도. 보길도는 이번 답사에서 우리가 지적 유희를 즐길 곳이며, 고산은 우리에게
해남윤씨 종가에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와 살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아버지 이외에는 특별히 스승도 없었으나 경사백가(經史百家)를 두루 읽고 의학,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독서하여 교양을 쌓았다. 특히 소학을 가까이 하여 처신과 공부의 지침으로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8세에 해남에 있는 백부 윤유기(尹惟幾)의 집에 대를잇기위해 양자로 들어갔는데 원래는 유심의 둘째 아들이다. 당시에 해남윤씨 가문은 굉장한 부호였고 명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라났던 해남 연동은 굉장히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