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포석정에 대한 다른 기록들은 이 두 사료를 참조해서 자신들의 추측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포석정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이 두 사료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내용이 다소 길기는 하지만 이 두 사료에 보이는 포석정 관련 기록을 옮겨 보면 아래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동국문헌비고』(1770년,『만기요람』 영국의 측량지도를 개정하고, 1853년과 1854년의 러시아 선박 측량을 기초로 하여 1857년에 러시아가 다시 실측한 지도를 일본해군성 수로국이 번안 편집해서 1876년에 발행한 지도. 이 지도에는 독도를 정북방향 3.5마일, 북서 10도 방향 5마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입니다. 우산도가 독도입니다. 분명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4.1868년(고종 5)에 일본 정부에서 만든 태정판 발행문서에서 "울릉도와 그 외 1개 섬인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 등 심득할 것"이라고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명시되어있습니다. 이
신증동국여지승람ꡑ에 의하면 충렬왕 8년(1282) 왕의 원비인 정화궁주 왕씨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송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여 이 절에 보관했다고 한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정화궁주가 불전에 옥으로 된 등잔을 올린 뒤 붙여진 이름이다.
전등사는 아담한 정취가 험준하지 않은 산새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독도는 512년 울릉도와 함께 신라에 귀복되었으며, 고려에서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살게 하는 등 울릉도와 독도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
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
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필두로 본격적인 의미의 지리지가 나온다. 그 중에서도 역시 대표적인 것은 부, 교, 군, 현 등 지방 각읍을 단위로 작성된 읍지이다, 이런 읍지들 가운데 사찬의 읍지들이 있어 주목된다. 조선시기는 그런 점에서 볼 때 지방사 서술이 매우 활발했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도기와 백옥을 명품으로 꼽았을 정도. 한동안 맥이 끊겼다가 50년대 들어 해강요의 유근형씨와 고려도요의 지순택씨 등이 모여들어 맥을 이었다. 요즘은 도예공장이 300여 개로 늘어나 국내 최대의 도예촌으로 자리잡았다. 분청으로 유명한 이은구씨의 청파요, 청자명품을 보려면
신증동국여지승람』, 1971. 현재에도 전국적으로 지역마다 ‘여우 고개’가 있다. 재인용.
’인 것이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여우가 사람들의 생활권 가까이 근접해 살았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여우의 생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여우와 관련해 많은 부정적인 속신, 금기, 풍습 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건국 후 태조 3년에 수도를 한양에 정하고 한성부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양주로 강등 되었다. 읍의 중심지를 견주의 옛터로 옮기고 태종 13년에 양주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세조 12년 양주목으로 승격되고 진을 두었다’고 한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한성부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