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안축은 원나라에서 요양로 개주판관에 임명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충숙왕에게 충애를 받아 고려의 벼슬을 받고 귀국했다. 왕명으로 여러 벼슬을 거친 후 강원도 조무사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후에 파면 당하나 다시 복직 후 이제현 등과 『編年綱
왕 12)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그 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
못하면 일방적으로 부인을 쫓아내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남아선호사상이 존재하지 않던 고려시대 남녀의 이혼은 정당한 이유가 있을 시 상호합의하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혼한 것이 흉이 되지 않았기에 고려 성종비와 충숙왕비와 같이 이혼한 여인이 왕의 배필이 되기도 하였다.
충숙왕 12)∼1395(태조 4). 고려 후기의 무기 발명가. 본관은 영주(永州:현재의 영천). 광흥창사(廣興倉使) 동순(東洵)의 아들이다. 우리 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으로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진 진()은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문(詩文)에 뛰어나 아들 3형제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당시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후의 석학(碩學)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익재(益齋) 제현(薺賢)은 백이정(白正)의 문하에서 학
충숙왕(재위 1314∼1330) 때까지도 그 자손들이 이어받았다고 한다”는 기록이 조선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실려 있다. 한편 《고려사》 <악지(樂志)>의 기록을 보면 송의 사악으로는 《석노교곡파(惜奴嬌曲破)》 《만년환만(萬年歡慢)》 《낙양춘(洛陽春)》 《감황은(感皇恩)》 《수룡음만(水龍吟慢)
충숙왕 10) 유청신(柳淸臣)·오잠(吳潛)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省)을 설립하여 원나라의 제성(諸省)과 동등하게 하려고 청하자(입성론) 이제현은 도평의사사에 글을 올려 고려 400년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이 문제를 철회케 하였다.
익재난고(益齋亂藁) 저자
長
왕 16)에 나눈 9주 중에서 상주(尙州)와 양주(良州)가 경상북도에 속했다. 그후 고려 태조 때에 동남도(東南道)로 되었다가 995년(성종 14)에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로 나뉘었으며, 1106년(예종 1)에 다시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로 합쳐진 후 몇 차례 개칭을 거쳐 1314년(충숙왕 1)에 경
충숙왕 17년)
출전 : <근재집(謹齋集)> 권2
<관동별곡>
바다겹겹 산첩첩인 관동의 절경에서
푸른휘장 붉은장막에 둘러싸인 병마영주가
옥대매고 일산받고, 검은창 붉은깃발 앞세우며 모랫사장으로
아, 순찰하는 그 모습 어떠합니까
이 지방의 백성들 의를 기리는 풍속을 좇네
아, 임금의 교화 중흥하는
왕묘(文宣王廟)를 중심으로 하여 강당으로서 명륜당(明倫堂)이 설치되었으며, 교사는 조교(助敎)라고 하였다. 의종 이후 국정이 문란하고 학제 또한 퇴폐하니 향교도 역시 쇠퇴한 상태였다. 결국 향교는 신 집권기와 몽고와 왜의 침입 등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 후 충숙왕은 학교를 진흥시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