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14세기 고려사회는 12세기 말 이래 파행적인 정치형태인 무인정권의 등장, 농민항쟁의 폭발 등에서 파생된 심각한 대내적인 모순과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 그것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또한 元(원)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대외모순까지 중첩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정치․사회사는
Ⅰ. 들어가며
이상곡은 쌍화점, 만전춘별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조선시대에 배척되었던 대표적인 고려가요이다. ‘악장가사’에 가사가 ‘대악후보’에 음악이 전하고 있으며, 조선 성종 때에 이르러 가사가 음란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곡조만 남았다가 그 시
(2) 100년에 걸친 몽골공주와의 결혼
고려25대 임금 충렬왕부터 31대 임금 공민왕까지 약 100년간 고려의 왕들은 모두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동안 5명의 고려왕이 8명의 몽골여인과 결혼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이 몽골에 인질로 잡혀가 몽골 공주와 결혼한 고려왕들이다. 왜 임
왕들은 세자 때 원에 머무르면서 혹은 원 황실로부터 왕위에 책봉 받고 나서 원 황실의 공주들과 결혼을 함
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31대 공민왕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제국대장공주)이 충렬왕에게 처음 시집간 이래, 총 7명의 원 황실 공주가 고려왕과 혼인
원 황실
왕(忠烈王)은 재위 중(王24년, 1298) 원의 압력으로 아들인 충선왕(忠宣王)에게 전위(傳位)했으나 7개월 후에 원은 충선왕을 퇴위시키고 충렬왕을 재즉위(再卽位)케 했다. 10년이 지나 충렬왕이 죽자 그동안 원도(元都)에 불려가 있던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였다. 그 후에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忠惠王)의
1. 서론
14세기의 전반의 ‘개혁정치’란 개혁정치란 기존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폭력적이 아닌 합법적인 방법으로 기존의 낡은 제도나 기구를 변화시키거나 개조하는 것을 의미하며 아울러 ‘게혁안’이란 홍자번의 便民十八事 이하 국왕들의 교서에 나타나고 있는 당시
왕 때 신관리에 창건된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이와 같이 향교는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주기적으로 보수가 뒤따랐는데, 중수에 따른 기문이 전해오고 있어 각 향교의 역사를 대체로 추적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각 향교에 중수현판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그 역사는 망각의 언덕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
왕들은 원에 의해 지명되었는데 그 결과 고려의 왕권은 대단히 취약하고 불안정해졌다. 잠재적인 왕권 경쟁자들은 원의 중앙정부를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야심가들은 그 주위에 결집하여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음모를 꾸몄다. 음모가 너무 치열했으므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왕과 高麗의 충숙왕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朝鮮時代에 이르러서는 명종 때 義賊으로 불린 林巨正이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林巨正은 재능과 학식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賤民신분의 백정이라는 것 때문에 官職에 오르지 못하였다. 林巨正은 이러한 時代의 부조리에 항거하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