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의 『응제시주』(1396) “옛날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 내려오자 국인이 임금으로 세웠다”라는 구절에 닿아있다. 여기에는 여전히 신이를 부정하지 않는, 건국에는 신성(神聖)이 따른다는 신화적 인식론이 작동하고 있다. 즉, 19세기 말 신인 계열 역사교과서에는 갑오개혁이라는 계몽적 흐름에도 여
권근 등은 그 대표적 유학자이었다. 또 세종대에 집현전을 중심으로 통치체제 완성에 공헌한 학자들 중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에 긍정적·협조적 태도를 취하여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하였던 신숙주, 한명회 등의 유학자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사변적이며 형
이상학적인 학문보다는 실제적인 전례(법
되었으며, 인물본위의 교육제도를 학벌ㆍ시험본위의 교육제도로 전환하였다.
신라 설총의 화왕계
비유와 풍자로서 신문왕을 훈계하는 우화적인 왕자지계로서 설총의 군왕교육사상이다. 왕자지계의 서로 이황의 ‘성학십도’, 이이의 ‘성학집요’, 권근의 ‘수창궁 재상서’ 등을 들 수 있다.
권근이첨 등이었으며, 교리(5품 이하)와 설서정자(7품 이하) 등의 벼슬을 두었으나 모두 겸직이었다. 집현전의 관원을 겸관으로 채운 것은 경연의 직능이 빠진 때문이 아닌가 한다. 1410년(태종 10) 11월과 1417년(태종 17) 1월에 집현전을 다시 세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세종 조에
권근은 조선왕조 문학의 지향점으로서, 문학의 이념은 성리학에 근거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세웠다. 한문학과 성리학의 무르녹은 접합은 선조대에 들어와서 성립되어 性情美學으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2) 《동문선》과 조선문학
태조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건국의 주역을 담당한 지식인들은, 개
임명하였는데, 그중 한상경, 이원, 박은, 이직, 정탁은 태종대의 공신 이였다. 이들 중 권근의 처남인 이원을 제외하고는 대개 3년 이내에 관직을 그만 두었으며 세종 10년 동안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들을 제외한 14명의 정승은 대왕이 모두 유학적 재질과 소양을 보고 재상에 임명한 사람들이다.
부르지
않았다.
-이이(李珥),「김시습전」
“여덟 달에 말을 알아들었고, 두 돌에 글 지을 줄 알았다”
「서민(敍悶)」3
“세종께서 아시고 궁궐로 부르시매, 큰 붓 휘둘러 날아갈 듯 글씨 썼도다”
「동봉육가(東峰六歌)」3
당대 최고의 스승이자 이색의 손자이며 권근의 외손인 이계전에게 수학함.
가열.
사장학은 권근-서거정·성현-김일손·남효온·조위에 의해 성해지고, 성현·남곤·이행에 의해 사장 옹호론으로 발전
<조선전기 사조적 특징>
정도전 도은문집서→문을 재도지기로 생각하되, 도를 싣는 그릇인 문을 통해 도를 구현하는 길은 경을 근본으로 삼는 데 있다는 존경의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