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되지 않는 올바른 선비라면 기존의 규범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창조하는 문학을 해서 삶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며 세상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익의 한시는 집권층을 비판하는 데 이르렀으며, <해동악부> 119수로 역사를 회고하는 것을 가장 두드러진 성과로 삼았다.
성호 이익
절실하게 묘사, 개탄하는 마음을 씀, 감회를 나타내는 데 치중하려면 시가를 택했음
->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는 한시라도 작품을 다듬기보다 내용을 앞세웠음.
-> 새로운 경험을 했기에 설명이 아닌 묘사에 힘썼음
-> 국문본으로도 나와 국문사용의 확대를 입증
임진왜란 관련 작품
징비록
유성룡
한시적인 한계성을 갖고 있었다.
1-2. 종이의 역사
1-2-1. 종이의 어원
-지(紙)의 어원
중국에서 <紙>는 <絲>와 <氏>가 합쳐진 단어로 <즈->라 발음된다. 이는 최초의 종이가 어망의 폐물 혹은 실(絲)을 엮어서(編) 만들어진 데서 표음문자 <紙>가 된 것이고, <紙>와 <字>의 발음을 <즈->라고 하는데 이것은 글을
일반적으로는 아주 먼 옛날을 가리키는 말로, 태고, 상세, 상대라고도 한다. 역사시대의 가장 처음, 문자로 기록된 역사 중 가장 오래된 시대를 말한다.
상고시대 문학의 갈래
1. 서정 문학
대부분 설화 속에 삽입된 형태로 정착되어 설화와 가요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집단적인 원시 종합 예술
별곡(別曲)
1. 별곡이란
별곡이란 고려 시가의 또 다른 형태이며 곡의 이를 통해 처음에는 별곡이란 용어를 시가의
변체라는 사실이 중요 유형적인 이름으로 사용한 것 같으나 뒤에 와
서는 한시 아닌 국문시의 제목에도 사용했음을
곡과 별곡의 차이는 전해진 악보로서 드러난다. 알 수 있음, 그렇기에
한시(漢詩)로 지어 부르곤 했다. 이들이 지어 비통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소리 가락에 실려 애절함을 더해갔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던 조선 후기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자 명맥을 이어온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이라는 음율을 붙여 부르
한시 등에서 뛰어난 서정성을 발휘한 작가이다.
송강은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업적은 거의 남기지 않고 문학 작가로서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그는 성리학자들이 재도적(載道的) 문학론 재도적 문학론이란, 중국 송대의 전형적 도학가이자 송학의 시조인 주돈신(周敦, 1017 ~ 1073년)으로부터 전개되어 정
한시, 가사, 시조, 사설시조, 언문풍월, 민요, 창가, 신시, 자유시, 산문시 등 시형과 주제 및 성격이 서로 다른 여러 갈래의 시가들이 신구장르의 공존으로 다채롭게 뒤섞여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1910년대의 주역들이 시에 문화의 접변기의 혼란 및 갈등을 반영하였고, 대부분이 서구문화를 경험한 신세
한시로 번역한 것을 말하는데 우리문학에서 小樂府라는 이름을 최초로 쓴 사람은 李濟賢이다. 그가 小樂府를 지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 것에 대한 주체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 것에 대한 자주의식이 생겼다는 데에 가장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따라서 고려조에 한역되어 전하는 17수의 小樂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