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서기론적 근대화를 표방했고, 이는 선교사의 신학적 흐름과도 직결되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 시대의 신학적 흐름은 세가지 였는데, 첫째는 모페트와 레이놀즈, 그리고 클라크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 시대의 역사적 칼빈주의의 보수신학, 둘째로 헐버트와 스코트를 중심으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었다. 전통문화의 정신을 고수하면서 서구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려는 사상이었다. 이는 중국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같은 기조에 있었던 점진적 개혁이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수 유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자도 못하였고, 또 너무나
동도서기(東道西器)적이고 온건한 개화 정책이었다. 이렇게 점진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도중에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서 조선은 최초의 근대화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강화도조약 직후 정부의 개화정책으로 정치의 시야가 넓어지고 국방체제가 개선되고 있었으나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온건개혁파의 대립으로 지식인들의 분열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서양 문물이 제도적으로 수락되기 시작되지만 동시에 외국 세력의 침투 루트가 된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모순을 비록 일본의 세력을 빌리고는 있지만 그 사회
만들려는 자강정책이었고 전면 서양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880년 중국의 ‘총리아문’과 비슷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혁의 중심기관으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성격의 개화논리는 차츰 동도서기론으로 구체화되고, 대한 제국기에는 구본신참, 즉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
Ⅰ. 요약
1. 동도서기론과 문명개화론이 지향한 근대화는 무엇인가?
1.1. 동도서기론이 지향한 근대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은 동양의 도인 유교적 질서를 지키는 가운데 서양의 우수한 군사,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국가체제를 유지하고자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조선 후기 서양이 하나의 위
동도(東道)’니 ‘서기(西器)’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동양의 학문이건 서양의 학문이건 ‘실용(實用)을 먼저 하고 ’문화(文華)를 뒤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Ibid. p.230
사상적으로 그들은 전통인 유학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고, ‘실용’에 도움이 되는 서학을 총체적으로 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