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 척사위정, 개화, 민족종교와 민중운동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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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사위정, 개화, 민족종교와 민중운동 사상
척사위정 운동은 반침략 반외세의 특성이 두드러진 재야 유생들의 상소 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사의 전개에 대한 인식의 한계와 계급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이들은 근대 민족 국가의 전망을 갖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척사위정 운동을 바로 자각적인 근대 민족주의 운동으로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반침략 반외세라는 특성은 후기 민중의 계급적인 이해와 정서에 연결되어 대중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1)한국 철학사상 연구회『강좌 한국철학』222p 예문서원 2005.09.15
척사위정과 의병 운동은 한결같이 리(理) 중심적 사상의 경향을 나타낸다. 따라서 척사위정 운동과 리 중심적 사상의 관계성을 밝히는 것은 사상적 기반을 해명하는 주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주리’와 주기‘의 논의의 핵심은 이황처럼 ’理氣互發을 주장하여 리에 운동성을 부여함으로써 기에 대한 리의 주재성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氣發一途’를 주장하여 리의 운동성을 부정함으로써 리에 대한 기의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리기론의 일반에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이황 이후 영남학파(주리)는 물론이거니와 이이 이후 기호 학파(주기)에서도 리를 기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Ibid. p.225
영남학파의 학통 의식을 바탕으로 이진성은 리를 본(本)과 주(主)로, 기를 말(末)과 객(客)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기의 운동성’은 ‘리의 운동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으므로 굳이 기발(氣發)을 말할 필요가 없으며, 실제 내용으로 볼 때 그것은 리발일도설(理發一途說)이라고 말할 수 있는것을 의미한다. 기호학파의 이항로 및 김평묵과 유중교도 리 중심적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도 역시 리와 기를 주(主)와 객(客), 존(尊) 비(卑),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 등으로 대비하고 있다. 더 나아가 기호학파에 속하는 기정진은 기호 학파의 ‘주기’론적 경향에서 벗어나 리 중심적 경향을 띨 뿐만 아니라, 마침내 리기일체관(理氣一體觀)을 바탕으로 하는 유리론(唯理論)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기의 운동은 리의 명령을 받아서 하는 것이어서 결국 기는 리가 운동하는 손발에 지나지 않으므로 기를 리에 대비시켜 거론할 수조차 없다고 보았다. Ibid. p.226
그러면 흔히 공리공론으로 일컬어지는 리 중심적 주자학이 어떻게 척사위정이라는 강한 현실관과 실천관을 가지게 되었을까? 척사위정론자들의 ‘주리’ 또는 ‘유리설’은 우선 리와 기를 분명히 구분해 낸다거나, 아예 기를 없애 버려 리의 절대적 위치를 확보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이것은 당시 지켜야 할 ‘바른 것’이 무엇이며, 내다 버려야 할 ‘나쁜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그들의 필요와 짝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바른 것’은 선의 근원인 리를 말하고 ‘나쁜 것’은 악의 근원인 기를 말한다. 그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말한 ‘바른 것’과 ‘리’의 세계는 주자학적 봉건질서를 가리킨다. 그들은 그것을 절대선으로 파악하였다. 이 때문에 리 중심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한 그것으로부터 도저히 반봉건 의식이라든가 근대를 향한 전망은 기대할 수는 없게 된다. Ibid. p.227
개화사상
개화사상은 19세기 후반기에 형성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외래의 문물, 특히 서양식의 문물 도입을 주장하던 사상이었다. 외래의 문물을 수용하는 폭이나 시기 및 태도에 따라 개화사상은 크게 3가지의 분파로 나누어진다. 변법 개화파, 시무 개화파, 애국 계몽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Ibid. p.228
변법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옥균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철학적 태도를 견지한 사상가이자 개혁가였다. 그는 “내 생각으로는 실사구시만한 것이 없으니, 곧 한두 가지 긴요한 것들을 급히 시행해야 하지, 원대한 책략을 편다고 하여 한갓 헛말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사고에 입각하여 현실 문제를 구체적으로 탐구한 결과 그는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한다. 실사구시의 태도는 박영효에서도 유용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동도(東道)’니 ‘서기(西器)’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동양의 학문이건 서양의 학문이건 ‘실용(實用)을 먼저 하고 ’문화(文華)를 뒤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Ibid. p.230
사상적으로 그들은 전통인 유학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고, ‘실용’에 도움이 되는 서학을 총체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논리를 개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변법 개화파가 진보와 자주를 실천하고자 애쓴 근대화 운동의 기수였다고 하는 평가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와 함께 소수엘리트의 개화사상이 광범위한 민중 속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군주 측근의 집권파를 제거하거나 군권 변법에 의해 위로부터 개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 Ibid. p.231
시무개화파는 청의 양무론적 개혁을 조선 사회 개혁의 모델로 삼고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변법개화파와 구별되었다. 이들은 상호 의존적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지향과 방법은 개량적이었고 온건한 점진적 개화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인 유학에 대해서도 유학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정신적 측면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김윤식은 개화란 곧 그때그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청렴을 숭상하고 가난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휼하는 데 힘쓰며, 조약을 잘 지켜 우방과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Ibid. p.232
유길준의 경우 “무릇 개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온갖 사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른것을 말한다. 개화란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하여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완전한 사회를 이루는 것을 개화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개화의 단계를 미개-반개화-문명개화라는 세 단계로 발전한다 하여, 개화를 진보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들 개화사상은 개혁의 단계를 중시하는 비근본적인 시무론(時務論)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들 역시 변법개화파와 마찬가지로 대중 계몽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획득하려는 과정을 결여하고 있었다. 사회 변혁을 거부하는 체제 내적인 성격으로 인해 자연히 개혁 방향을 기존의 지배 계층 중심으로 하면서 지지부진하게 이끌어 가게 하였다. Ibid.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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