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朝貢)을 해왔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일제 시기 일본 관학자들의 해석 -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羅(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조공(朝貢) 관계이다. 우리나라 역시 예부터 조공을 바치는 형태로 중국을 부모나라로 모시기를 자처, 중국의 문화적 테두리 안에 자리 잡아 왔다. 하지만 전통적 사회 발전의 한계가 부각되고 전통 사회의 틀이 깨지기 시작한 시기가 오자, 자연스럽게 중화제국의 재편이 활발히 진행된다. 일본 오키나
조공을 받쳤다. 유구는 또한 중국에도 빈번히 조공을 받쳐왔는데 이러한 조공의 예에 대해 중국 측은 국왕이 즉위하면 그로부터 2~3년 후에 책봉사절을 보내어 국왕 취임을 인정하는 절차를 밟게 했으나 이는 실제로 중국에게 정치적으로 지배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국제
조공무역에 의한 이윤을 핑계로 화이질서의 유지가 추구되었다. 확실히 중화의 압도적인 정치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중화 독존의 통제적이면서 개방적인 세계가 구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로운 중화 세계의 중국을 재생하려는 명조의 시도는 영락 시대 동아시아에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
조공사(朝貢使)를 파견하여 당과 외교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고구려는 고구려 영류왕(營留王) 2년(619)에 처음 조공사를 보냈고, 백제와 신라는 같은 해인 무왕(武王) 23년(621)과 진평왕(眞平王) 43년(621)에 각각 처음으로 조공사를 보냈다. 그런데 당은 삼국의 조공사가 처음 도착했을 때 책봉해주지 않고
전통 시기의 한반도 정책
“책봉∙조공”-천하중심적 중화 사상
책봉-중국에서 사신을 보내어 임금을 봉하여 세우는 것
조공-주변국이 중국에 정기적으로 사절을 파견하여 공물(貢物)을 바치는 외교형태
국제관계에서 매우 보편적인 외교행위
유교 문명권의 특징
전통시기 유교 문명권의
조공 무역에서 벗어나 나(羅), 당(唐), 일(日) 삼국의 민간 무역을 주도 하고 동남아 및 아랍과의 중계 무역과 국내 연안 무역을 활성화 시켰으며 그 당시 자주 출몰하던 해적선을 소탕하여 연해민의 평화로운 생업을 안정시키는데 이는 조직적인 함선세력으로 동북아시아의 해적을 소탕함으로써 신라인
조공체제를 청산하지 못하였다.
청나라가 1895년 청일전쟁으로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을 상실하기까지 20여 년 이상 중국과의 조공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반도에는 조약체제와 조공체제라는 이원적 국제질서가 온존하였고, 이것은 역사발전의 시간을 지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