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遺事 第 1卷 紀異 第 1 四節遊宅, 辰韓)
신라 전성기에 서울 안에는 17만 8936호, 1360방(坊), 55리(里), 35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여기서 금입택(金入宅)은 부유한 큰집을 뜻한다. 49대 憲康王 때를 살펴보면 四節遊宅이라는 것이 있었으며, 그 당시 서울 안에는 초가집이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향가는 신라사회에서 생성되었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성장하였으며, 그 역사와 함께 소멸되어간 시가 장르이다. 이러한 향가는 생성된 공간성이나 시간이 모두 신라 문화에 귀속되고 있다. 다시 말해 향가는 신라라는 시공간의 영역 안에서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가에 대한 전반
3. 삼국유사에 드러난 불교의 대중화
3.1. 승려들의 교화 활동
3.1.1. 혜공 (三國遺事, 二惠同塵)
- 釋惠空天眞公之家傭嫗之子小名憂助(석혜공천진공지가용구지자소명우조)
: 승려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였다.
- 常住一小寺(
三國遺事』에서도 향가라는 말이 발견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760년~798년(신라 경덕왕 19년부터 신라 원성왕 4년경)에는 향가에 익숙한 國仙과 향가를 잘 부르는 스님이 있었으며, 신라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향가를 숭상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문학개론 편찬위원회, 『한국문학개
Ⅱ. 본론
1. 김부식의 「三國史記」와 일연의 「三國遺事」의 역사인식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두 책 모두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려던 때, 새로운 역사의 전범을 수립하고자 하던 시대적 요구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점에선 그 출발 동기가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