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관력을 독점하고 대토지를 겸병하여 그 정점에 서 있었다. 이들 문신귀족정권은 점차적으로 중앙귀족, 왕도중심으로 굳어져 타의 정치참여를 거부하는 독선을 자행했고, 이로 인해 기층사회와의 괴리.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 사이의 유리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문벌
가요로서 향가의 맥은 이른 시기에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소멸기 향가는 향찰표기의 양상이 신라시대 향가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10구체 향가의 3분단되는 형식이 4분단되는 것과 같이 단락구조에 변동이 오면서 그 길이가 점차로 늘어나고 감탄사의 위치에 변동이 나타나는 등의 변화를 보였는
속하는 여성인 희명이 '천수대비가'를 짓는 등 신분이 낮은 층의 참여도 보인다. 향가의 작가는 왕에서부터 승려, 화랑, 평민, 천민까지 다양하며 여류의 노래도 상당수가 있다. 그러나 향가의 중심이 되는 작가층은 화랑과 승려계층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그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들은 득오곡(得烏谷)·
국문학사에 보이는 시가문학(詩歌文學)도 한시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한국한문학의이해4공통) 신라 말의 6두품, 고려 중기의 고문가,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 조선전기의 관각파·사림파·방외인 등 나말여초부터 여말선초까지, 1. 각 시대별로 문단을 주도한 문인과 그 주요 한
관계하고 있었다. 여기에 기폭 장치를 마련한 것이 동경 유학생 신분의 김기진이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유포된 신흥사회과학에 빠져든 다음 특히 계급주의를 지향한 『씨뿌리는 사람』을 탐닉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정신적인 동조자를 찾아 나서서 먼저 배재고보의 동창생인 박영희, 이상화, 안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