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어느 시대든 정치적·사회적으로 새로이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이라면 나름대로의 고뇌와 책임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나말여초’의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펼 기회조차 없었던 최
溪는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의주로 杖配되었다가 순천으로 移配되었다.
와, <만분가>를 창작하게 된 경위 매계는 끊임없이 유배생활을 하였으나 翰墨을 폐하지 않았다. 萬憤歌의 지음은 本歌 중의 ‘湖南 어늬 고디’ 의 한귀를 보아 순천시대임이 밝혀졌으며, 또 梅溪는 이 노래를 徒作하였음에 그친
溪)인데 ‘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른다.는 뜻의 ‘퇴거계상(退居溪上)’에서 비롯되었다. ‘계(溪)’는 이황이 물러나 머물렀던 ‘토계(兎谿)’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해석된다. 청량산(淸凉山) 기슭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도옹(陶翁)ㆍ도수(陶搜)ㆍ퇴도(退陶)ㆍ청량산인
송명이학시대
주 렴 계 (周 嫌 溪) 논평
1. 주렴계(周濂溪) 보충
우주론적 철학의 창시자는 주돈이(1017~1073)였다. 자 무숙(茂叔). 호 염계(濂溪). 도주 호남성 도영현(道州:湖南省 道營縣) 출생. 지방관으로서 각지에서 공적을 세운 후 말년에는 혜원과 도생이 불법을 강론한 것으로 유명한 여산(廬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