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와 모순 되는 것은 서교로서의 천주교이지 결코 서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경시하는 조선유교의 사상이 결과적으로 서기의 도입에 의한 국방적 관심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말았다. 문에 의한 언론이 아무리 격렬할지라도 그것으로 국권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립자존의
농민전쟁ꡑ의 백주년을 기념하여 수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한 집중적인 논의가 있어 왔다. 그 가운데 한국역사연구회가 다년간에 걸쳐 근대사연구의 신진 기예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동원하여 편찬한『1894년농민전쟁』1˜5(역사비평사, 1988˜1995)는 농민전쟁의 배경?전개?귀결을 경제?정치?사상
정치적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 황에서 개화파가 1884년 시도한 정치적 변혁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1884년 겨울 김옥균, 박영효, 홍 영식 등의 개화파들은 자신들이 주도하여 세운 우정국의 낙성식 연회를 이용하여 정치적 변혁을 단행하였다.
즉, 그들은 수구파의 거두인 민영익(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는 유(儒)ㆍ불(佛)ㆍ선(仙)이 비록 뜻을 달리하고 있으나 그 근원은 모두 하늘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학은 이 세 가지 도(道)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점을 버린 것이라고 밝혔다.
동학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여 사회의 변화를 갈망
대원군의 극심한 쇄국정책(鎖國政策)에 의하여 새 시대로 나갈 기회를 놓친 조선 왕국은 민씨 일파에 의해 완전히 퇴행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막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은 김옥균이 보고 느꼈던 조선의 현실은 이렇듯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