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와 모순 되는 것은 서교로서의 천주교이지 결코 서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경시하는 조선유교의 사상이 결과적으로 서기의 도입에 의한 국방적 관심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말았다. 문에 의한 언론이 아무리 격렬할지라도 그것으로 국권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립자존의
개항의 자극으로 활성화되었으며, 이러한 과도적 상태는 대체로 1910년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개항기의 시대사적 의의는 임박한 식민지화의 위기에 전통사회가 정치 수준에서 어떻게 대응하였던가라는 문제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재작년, ꡐ1894년농민전쟁ꡑ의 백주년을 기념
문호개방과 대외통상의 필요성은 이미 북학파 실학자 인 박제가에 의해 제기된 바 있었다.
또 개항전에도 김정희(金正喜), 박규수, 오경석 등 일부 선각자들은 청 의 양무운동과 양무론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세계정세의 대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식견을 일부 청년들에게 전파하고 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민씨 세력과 유림들의 연합공격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대원군은 고종이 등극하던 1863년부터 10년 동안 강력한 통치권자로 군림하였다. 외척의 폐단을 극도로 경계하여 몰락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들였으나, 결국 그에 의하여 권력의 정상에서 물
농민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였다.
이미지 크게보기상주 동학교당
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김주희가 교세부흥을 위해 1924년 건립하였다.
동학의 발생
동학(東學)이라는 명칭은 서학(西學)에 대립된 것으로, 최제우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