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고초를 격은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지만 1년 만에 풀렸다.
이후 10년 동안 윤선도는 보길도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해남의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에 묻혀 지냈다. 이때 금쇄동에서 소박한 산중생활과 한가한 정서를 읊은 것이“산중신곡”, “
고산은 강화도에서 뱃머리를 돌렸을 당시에 조선의 항복 소식을 듣고도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를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이유로 서인들로부터 계속해서 시비의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죄가 되어 2년 후인 1638년에는 1년간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해배(解配)된 후 해남에
고산은 국문학사상 단가의 일인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그의 작품 <산중신곡>은 물론 이 <어부사시사>는 최고의 금자탑으로 뽑힌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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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산윤선도의 생애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
고산의 문학은 크게 3기로 구분된다. 함경도 경원 유배지에서 지은 ‘견회요’, ‘우후요’로 대표되는 초기와 해남의 금쇄동과 완도의 보길도 등지에 머물며 지은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어부사시사’로 대표되는 중기, 그리고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서 지은 ‘몽천요’로 대표되는 후기가
부딪히기도 했고, 때로는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고산 역시 이러한 시대적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남인 계열에 속했던 그는 젊은 시절에는 대북파와, 노년에는 서인과의 대결에 적극 투신하였고, 그 과정에서 중앙정계로의 진출과 향리인 해남으로의 운둔을 허다하게 반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