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은 국문학사상 단가의 일인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그의 작품 <산중신곡>은 물론 이 <어부사시사>는 최고의 금자탑으로 뽑힌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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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산윤선도의 생애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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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 다사리고 뱃밥을 박앋나냐 <동사2>
이처럼 고산은 어부사시사에서 주로 순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국문 경시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에 국어 애호(國語愛好)의 실천자였으며 동시에 운율적 효과를 높이고 시의(詩意)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2.2.3 음수율(音數律)의 파격(破格)
고산은 이곳을 은거지로 삼고 삶의 터전을 마련한다. 보길도의 산간 지역에 위치한 부용동(芙蓉洞)은 그 산세가 연꽃처럼 포개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하여「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등과 같은 고산의 대표적인 작품이 모두 보길
작품들은 그가 처한 공간에 따라 현실참여에 대한 동경과 갈망, 그리고 탈속적 자연에서의 안주와 몰입 등의 상반된 욕구가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현산면 금쇄동에서 지었던 ‘오우가’에 등장하는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물은 흘러가
읊은 것이“산중신곡”, “속 산중신곡“들이었고,65세(효종2,1651)에 보길도의 춘하추동을 배경으로 지은 것이 ”어부사시사“이다.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은 윤선도시가문학의 2대 산실이 된 것이다.
효종이 즉위한 후 봉림대군 시절의 사부였던 윤선도를 불러 동부승지, 예조참의 등의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