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은 대외 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비옥한 평야를 만들어서 이 지역의 경제적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들은 영남 지방의 문화가 꽃피고 그것을 보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더군다나 신라시대부터 전파된 불교문화와 조선시대에 들어 영남지방에 기반을 잡고 학풍을 만들어간 사림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에 비로소 현재의 이름인 '인천'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토 전체에서 보는 인천의 위치는 한반도의 한 가운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황해에 접하여 있고 한강의 하류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인천은 남쪽과 북쪽의 중간
문화권을 살펴보고 낙동강문화권만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특징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치적 문화적 특징을 찾고자 한다.
먼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택리지와 여지도서의 소개와 함께 낙동강문화권의 전반적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뒤에 낙동강 지리를 자세히 살펴보고
문화권의 그림과도 구별 되는 한국적 특징을 이룩하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특히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켜 나갔던 시대인 조선후기는 우리 회화사에 있어 가장 한국적 고유색을 발현했던 시대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에 대한 고찰’ 이라는 명제 아래 겸재 정선에 의해서 진
조선 때의 강 이름,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금의 압록강, 또는 청천강이라는 설이 있는데 아직 정설은 없음)와 대수 두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삼국사기> 권 23, 백제본기 1, 백제시조 온조왕 즉위년조)
- 인천을 근거지로 택한 이유
비류가 미추홀 즉 인천지역을 근거지로 택한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