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감연히 싸운 것은 일반 국민이었다. 특히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을 배운 신 지식인층이 그러하였다. 이들은 각종 정치 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 독립과 민권의 확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러한 여러 단체들의 시초를 이루고 또 활동이 가장 맹렬하였던 것이 독립협회였다.”
대한제국 재정 정책은 주먹구구식.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p85
고종의 매관매직은 <매천야록> 정축년(1877) 봄에 정시 문과를 설치하여 5명의 급제자를 냈다. 이 때 남정익은 의부 부윤으로 있으면서 돈 10만 꾸러미를 상납하고 그의 아들 남규희를 수석으로 급제시켰다. 그리고 그 밖에 4명도 고종의 낙점
고종’을 높이 추앙하기에 이르르고 있다. 고종이 영․정조 대에 제기된 ‘민국’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서구 정치사상을 수용하였으며 개화기 근대개혁을 선도하여 대한제국의 수립과 광무개혁을 이끌고 있으며 일제의 침략에 대항한 위대한황제였다는 것이다. 그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웅인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기게 된다. 이로부터 6개월 뒤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현재의 웨스틴 조선호텔 자리인 원구단에서 1897년 10월 12일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이 하늘의 신에게 고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의식을 행한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국호를 대한으
대한 대응은 결코 체계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세도정치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부친이 대원군의 직함으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마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적 정비를 우선한 나머지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1880년 고종은 드디어 개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