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민씨 지배하의 정부는 외국 세력에 의존함으로써 그 존립을 꾀하려는 의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국가적인 재정은 더욱 심하여 갔다“
“황제와 대신들이 외세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존하려는 고식적인 길을 취하고 있을 때에, 정부의 무능한 시책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
고종황제의 권한 강화를 주장하였다. 각기 의병운동과 (애국) 계몽․자강운동 등으로 발전한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는 일제하에 신민회(1907년) 결성으로 어느 정도 합작이 이루어졌으나 그 후 계속해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또한 위정척사운동과 농민운동의 연합 성격인 의병운동은 일
제 44권 커피의 도입에도 “특히 왕가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관에 있는 동안 익숙해져 아주 좋아했다.“고 언급되어있다.
이 때문에 대게 고종은 커피를 최초로 마신 한국인이라고 전해진다.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Ⅰ. 한국근현대사와 운요호사건
1875년(고종 12년)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경기만에 불법으로 침입함으로써 일어난, 강화 수비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 강화도 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굳게 지키자 일본은 무력으로라도 문호를 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군함을 보내어 먹을 물을 구
고종(이희)의 정치
1874년 고종친정 이후 정치적 격변기마다 국왕권의 약화나 견제를 담은 綸音이 나왔다. 임오군란 직후, 갑신정변 직후, 원세개의 고종폐위시도 직후, 그리고 갑오개혁 직후에 그러했다. 개항기 정치상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나온 것이다. 윤음은 대체로 국왕의 이름을 빌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