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1880년 고종은 드디어 개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개화 실상을 확인하고, 개화를 주도할 관서인 통리기무아문을 신설했다. 1881년에는 일본에 신사유람단, 중국에 영선사를 각각 파견하여 신문물 수용을 위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하였다. 이 무
개화기 근대개혁을 선도하여 대한제국의 수립과 광무개혁을 이끌고 있으며 일제의 침략에 대항한 위대한황제였다는 것이다. 그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웅인 동시에, 시대를 이끌고 간 주체였다. 저자는 1990년대 중반 제기한 ꡔ일본의 대한제국강점ꡕ에서 고종의 반일외교운동을 강조하였던
일본 등이 한반도 연안을 측량한 지도들까지도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바깥 세상에 대한 일종의 정보수집 행위였다.
고종은 원활한 개화정책의 수행을 위해 1883년부터 정부기관지로서 『한성순보(漢城旬報)』『한성주보(漢城周報)』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두 신문은 종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의식을 행한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국호를 대한으로 개정하여 내외에 선포한다. 그 결과 마침내 대한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성립된 대한제국정부는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의 원칙을 세워 개혁을 펼쳐 나간다. 일본에 기대어 개혁을 급
영환지략을 서술했다. 양무운동 시기의 동문관의 교과서였다.
등의 양무서(洋務書)를 읽으면서 바깥사정에 귀를 기울였고, 서양인 선교관과 고문관을 통해 서기를 수용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나름의 문명수용의 과정을 거쳐 군주가 직접 근대화 정책들을 추진한 것이다. 또한, 여러 차례의 보고를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