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에서 한가롭게 자연을 즐기기 전에도 임금의 은혜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안분지족하는 은사(隱士)의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과. 비록 은둔하여 있으나 임금을 향한 충의(忠義)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는 유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훈민가(訓民歌)
1. 부의모자(父義母慈)
강호가사는 주로 조선 전기 때 사대부들에 의하여 지어졌다. 강호가사의 ‘강호’는 가사의 향유 공간이자 사대부의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강호가사는 사대부 가사와 서민 가사가 분류되었을 경우, 사대부 가사의 하위 항목으로 들어가게 된다. 강호가사의 세계가 바로 사대부
몸이 이렁굼도 亦君恩 이샷다’ 시조 종장 형식을 취하는 낙구로, 시조 문학이 가사에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낙구가 쓰인 작품으로는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악장 <감군은> 등이 있다
는 말로 마무리를 삼았다 자신의 취흥을 임금의 은총으로 여김으로써 조정 신하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강호사시가는 조선 초기,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4수로 된 연시조. 만년에 벼슬을 내놓고 강호에 묻힌 자신의 생활을 춘·하·추·동 사철의 자연의 변화와 결부시켜 각 한 수씩 4수로 읊은 것이다. ‘강호가(江湖歌)’ 또는 ‘사시한정가(四時閑情歌)’라고도 부른다. 연시조 형태로는 최초이며, ‘강호
우리 시가문학의 초기 형태는 원시시대 祭儀의 현장에서 행해지던 종합예술에 포함되어 있었다. 迎神과 送神의 단계에서 구송되던 샤만의 呪文이나 巫歌 등도, 娛神의 단계에서 부족민들에 의해 행해지던 歌舞樂의 종합예술체 등도 시가문학 그 자체이거나 그 편린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었다. 악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