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는 개통이후 일제하에서는 물론 그러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교통수단의 주종으로서 한국근대화의 절대몫을 차지하였다. 1961년 통계를 보면 전국의 자동차 총수는 2만 9천 2백 여대(화물차 1만 2천 6백대, 승합차 4천 2백대, 승용차 9천 1백대) 뿐이었다. 도로라고 해야 2만 7천 1백여㎞로 4.1%만이 포
조선의 사람들은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근대화’되가는 사회질서를 느낄 수 있었다. 과거와는 다른 형식으로 서로간의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고 또 새로운 교육제도에 점차 익숙해지는 사회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어떻게 농민들의 삶이 변화 되
한국 근대사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시대 일본이 가져온 서구식 정책과 물적 인프라를 통해 한국 경제가 근대화의 궤도 속으로 진입했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리와 부딪히게 되면서 그 정당성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대한제국 시기를 평가하는
의미 : 일본이 실시한 대규모의 국토조사사업
• 토지 소유권 조사
: 준비조사, 일필지조사, 분쟁지조사
• 토지가격 조사
: 지위등급 및 지가 조사
• 지형지모 조사
: 삼각측량, 도근측량, 세부측량, 면적계산,
지적도 조제, 이동지 정리
토지 1,910만 7520필지의
근대화와 자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줄기차게 전개되던 근대 변혁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 같은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명 관료층, 지식인층, 자산가층 등을 중심으로 한 국권 수호 및 회복 노력이 애국계몽운동이다. 운동의 논리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하여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