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은 출가와 환속, 재출가를 거듭하면서 전국을 방랑하였다. 한때는 잠시 효녕대군에게 붙잡혀 내불당에 머물면서(29세 때, 세조 9년) 간경도감의 연화경 번역의 교정 일을 보기도 했지만,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곧 금강산에 은거하게 되었다. 그후 예종에 이어 등극한 성종은 학문을 좋아하여 학자
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이 열거한 순서대로 실려 있다. 원래의 작
품 수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책 제목 중의 ‘금오’는 김시습이 경
주 금오산에 있을 때 지었다 하여 따온 것이고, ‘신화’는 김시습이 읽
은
매월당시 사유록(梅月堂詩 四遊錄)」을 남겼다.
31세 때부터 경주의 남산(일명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정착하였으며, 이 시기에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창작하였다.
37세(성종 2년) 때는 상경하여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세우고 몸소 농사를 지어 생계를
김시습의 삶과 너무도 닮았으며, 비극성과 저항성은 김시습의 비타협적인 생애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금오신화」의 고독한 인물들은 김시습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금오신화」에서 현존하는 인간세계는 대단히 부정적이며,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은 고독과 우수로 점철된 비극적인
1. 매월당김시습의 생애와 문학관
1.1 김시습의 일생
김시습의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설잠(雪岑)이고,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그의 이름 시습(時習)은 그의 친척이며 집현전 학사인 최치운이 그의 재주에 경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