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1908-? 시인, 문학 평론가, 영문학자. 호는 편석촌(片石村). 함경북도 출생. 니혼대학(日本大學)문학 예술과를 거쳐 도호쿠 대학(東北大學)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경성중학교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으며 《조선일보》학예부장을 지냈고, 1993년 구인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46년
1.{김영랑(본명:김윤식)의 생애}
장흥에서 강진읍으로 들어오는 <영랑 로터리>에 우리 나라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는 영랑 김윤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던 그 영롱한 서정의 극치야말로 오늘날에도 아낌없는 찬사로 회자되고 있는데, 영랑은 그의 시심이
시인 그리고 그들의 언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살펴본 후에야 이해할 수 있다. 일제 통치 하에 한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던 때, 한국어의 훈련은 더욱 각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재 『한국문학사』 김윤식 ․ 김 현, 『한국문학사』, p327-357, 민음사, 1973.
에서 다뤄지고 있는
시인 김영랑에 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는 그의 초기 시에 초점을 맞춰 그를 1930년대 주정시의 대표적 인물로 보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후기 시에 초점을 맞춰 저항시인으로 보는 견해이다. 우리는 김학동의 논문「영랑 김윤식론」 과 김종의 논문「영랑시의 저
김윤식이 “백조의 데카당스는 일종의 예술적 저항이며 따라서 가장 데카당한 깊이에까지 도달한 시인일수록 가장 깊은 계급 혹은 저항이데올로기로 이행할 수 있다”고 도달한 결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화가 계급이데올로기를 선택했을 때, 그 이데올로기의 강도 혹은 경직성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