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R. Wilhelm)과 영국의 수딜(W.E. Soothill) 등이 論語 번역을 내기는 하였으나, 이미 유럽의 중국학계도 이때 와서는 論語의 번역보다도 그 내용이나 孔子 사상의 연구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독일인 프랑케(A. Franke)의 孔子의 교리와 중국의 국교(Das Confuzianische Dogma und die Chinesishe Staats-religion,
논어에서 보게 되는 것도 이러한 고대적 단순성이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者如斯夫 不舍晝夜: 子罕篇)”는 강변의 사색이 갖는 호소력은 그것이 아마도 최초의 발언이라는 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사한 감개의 토로는 그 후 얼마든지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
사상의 기초자가 되었고 중국 고대 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자는 미학문제를 전문적으로 논한 저작도 없고 이론도 후대의 순자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논어에 기록된 그의 말 중에서 미학 문제를 언급한 것은 그 범위가 상당히 넓다. 공자가 미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어에 명확한
10여 가의 주석서가 있었는데 모두 유실되고 곽상의 주가 남았을 뿐이다. 과상은 52편을 간추려 33편을 만들었는데 곧 내편7, 외편15, 잡편11이다. 내편은 장자의 근본사상을 폈고 외편, 잡편은 내편의 뜻을 부연한 것인데 잡편은 후대의 의작이라고도 한다. 당대에는 남화진경이라고 이름 하였다.
후 나는 ‘내가 현재 내 생활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 누군가 온전한 내 모습을 그대로 사랑해 준다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시는 부모님과 같이 나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었고 그것을 이 책을 통해 한 번 더 자각하게 되었다. 또한 나를 있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