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과거사 교육은 이러한 죄의식의 대물림과, 1969년 독일계 유대인 사회학자이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아도르노의 언명처럼 ‘모든 정치․역사 교육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중점이 두어져 있는 것이다.
2. 일본
1) 도쿄 재판을
일본 풀뿌리 시민사회의 성숙된 모습을 기억할 때 우리는 타자?타민족과의 공존을 모색할 수 있는 다원성을 일궈낸 그들 시민사회의 저력에서 화해의 가능성에 희망을 품는다.
그 때와 지금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ꡒ새역모ꡓ의 배후를 봐주던 산케이?요미우리신문 같은 대형 메
안중근 의사가 태어나던 해인 1879년에 헌법 연구를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헌법 초안을 작업했으며 마침내 헌법을 제정하였다. 1904년에는 총리로서 러일전쟁 개전을 결정하고, 한국 특파 대사로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그 다음 해인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게 된다.
일본의 책임 및 보상 등 과거 극복을 위한 노력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이는 독일과의 비교를 통하여 서술할 것인데 이는 20세기의 군국주의, 침략전쟁, 패전, 홀로코스트 등 역사적 사실에서 상당한 공통점이 있지만 역사에 기술되는 양상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난징 대학살에 대한 역사교과
일본의 교과서에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이라는 왜곡된 역사를 자아냈다. 독일은 91살 고령의 나치 전범에게 5년이라는 징역을 선고한데 반하여 일본은 다시 군부 주요직에 임명하였다. 전쟁 후 두 나라가 낸 피해 보상금의 액수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독일은 약 1,000억 달러(약 100조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