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의 이름은 다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라우센
버그와 존슨의 네오다다 행위와,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등의 팝아트 경향이
뒤샹의 미학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오다다와 팝아트 예술가
들에게 별로 호감을 보이지 않았던 뒤샹은 취리히 다다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술가가 되었는데 바로 화가 자크 비용과 조각가 레이
몽 뒤샹 비용이다. 누이 수잔느도 화가가 되어 나중에 화가남편 장 크로티와 함께 다다에 동참했다. 그러나 뒤샹이 예술가가 되는데 는 아버지의 특별한 반대가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의 예술에 대한 재능은 타고난 것 같은데 할아버지 에밀 니콜
미학인 아쌍블라주, 정크아트, 개념미술, 팝아트,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까지도 새로운 미학적 개념들과 형식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에 현대 미술에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마르셀 뒤샹의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여러 활동으로 인해 현대 미술의 많은
예술가들은 예술에 의한 놀이의 중심지를 만들고자 한다. 카바레라는 곳은 초청연주가가 와서 음악을 연주하고 매일 시 낭송이 열리는 장소이다.”
유고 발, 역사에서 오늘, 1916
뉴욕 다다는 뒤샹과 피카비아가 1915년 뉴욕을 방문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 뉴욕 그린위치 빌리지에 있는 미술 콜랙
회화방법이 보인다. 1913년에는 아모리쇼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1912)를 출품하여 ‘재현’행위를 전면 부정하고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반전통적인 사상은 미술에서 ‘레디메이드(ready made)’란 용어와 개념으로 점점 확실하게 정착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