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마르셀 뒤샹과 다다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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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마르셀 뒤샹(Duchamp, Marcel ) (1887.7.28~1968.10.2)

뉴욕 예술가들의 대부: 뒤샹

전통미학에 도전하다.

뒤샹의 다다이즘
본문내용
뒤샹은 이따금 재미로 여장을 하고 타인 행세를 했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로즈 셀라비(Pose Selavy)라고 명명했는데 셀라비란
'그것은 인생(C'est la vie)'에서 따온 말이었다.
만 레이는 뒤샹의 여장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원래의 것은 없어졌으며
재생한 것이 지금 구겐하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을 보면 뒤샹은
양손에 반지를 끼고 털목도리를 둘렀으며 얼굴에 화장을 했는데 실제 여자를
방불케 했다. 그의 원래의 모습은 마치 흉악범처럼 보이는데 여자로 분장했을
때는 아주 매력적인 여인처럼 보였다.1923년 를 제작한 후로는
서양장기에 전념하면서 예술을 등한시했지만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전람회
개최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는 뉴욕에서
제작한 것으로 유리창처럼 생긴 것을 통해 내부의 조직을 볼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그는 철사줄과 오일, 주석조각, 먼지를 사용하면서 호색적인 주제의 알쏭달쏭한
작품을 제작했는데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계예술의 이미지라고 했고 신비적 연금술적 상징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가장 설득력있는 해석으로는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사랑에 대한 기계적인
해석으로 사치스러운 교묘함이 있다"는 것이다. 가 1926년 브루클린
뮤지엄(Brooklyn Museum)에서 소개될 때 운반과정에서 실수로 유리가 깨졌는데
뒤샹은 1936년에 두꺼운 유리로 금이간 유리를 덮으며 구성이 '우연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선언하였다.


1920년 뉴욕에 있는 뒤샹의 아파트에서 만 레이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만 레이는 뒤샹이 발명한 의 제작을 돕고
있었는데 모터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산산이 흩어진 유리조각이
하마터면 만 레이의 목을 스칠 뻔했다. 뒤샹과 만 레이는 결함을 보완한 후
작품을 완성했다. 그것은 다른 크기의 직사각형태의 유리판 다섯 개가 각각
회전하는 것으로 유리판 양끝에 검정색으로 칠한 부분이 모터에 의해 빠르게
회전할 때 광학적 효과를 내는 작품이었다.뒤샹은 어려서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한 기질이 기계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제 2차 세계대전이래 레제는 브랑쿠시, 뒤샹과 함께 살롱 도톤을
관람하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뒤샹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마르셀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는 말없이 기계와 프로펠러들
사이를 걸어다녔는데 갑자기 브랑쿠시에게 '회화는 끝났다! 무엇이 이 프로펠러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넌 할 수있느냐?'고 물었다.미술계는 그가 예술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뒤샹은 1946년부터 20년동안
를 자신의 마지막 대작으로 제작했다.
1960년대에 뒤샹의 이름은 다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라우센
버그와 존슨의 네오다다 행위와,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등의 팝아트 경향이
뒤샹의 미학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오다다와 팝아트 예술가
들에게 별로 호감을 보이지 않았던 뒤샹은 취리히 다다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한스 리히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