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엽의 유럽인들은 영적으로 신앙심이 매우 고양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날마다 죽음의 기로 앞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전쟁, 기아와 홍수, 한 번 걸렸다 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마는 저주의 흑사병, 어린아이들의 조기사산과 같은 죽음의 그림자는 도처에 산재하고 있었다.
확립에 노력하였다. 특히 마르부르크회담에서는 성찬에 대해 일치를 얻지 못하고, 스위스 종교개혁자 U. 츠빙글리와도 결별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동맹의 꿈이 깨졌다. 루터는 최후까지 설교·강의·권고·저술에 종사하고 귀족들의 분쟁화해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마르부르크에서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의 교수들은 20세기 초에 최고로 현대적인신학의 대가들이었다. 신 칸트주의적 교의학의 주창자인 벨헬름 헤르만(1846-1922)은 그의 탁월한 교육법의 재능과 뛰어난 인격의 권위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자였는데, 젊은 바르트 역시 마찬가지로 그에게
신앙에서, 신이 인간에게 일러주는 말
이다. 이는 인간은 신의 공수가 없이는 신을 공경할 수도, 신을 맞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신을 주체로한 정의에서, 신은 화자의 주체성과 행동의 주체성을 동시에 향유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청자의 자리에만 머물게 되며 오로지 신의 허가ㆍ
1) 직접적 원인
텟첼의 면죄부 판매
피고해자들의 고해 필요성 부인
2) 95개 논조 발표(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문에 부착
단순한 신학적 개념에서의 논제를 하고자 발표
1) 3대 솔라
Sola Scriptura ( 솔라 스크립투라 ; 오직 성경)
Sola Gratia (솔라 그라티아 ; 오직 은혜)
Sola Fide (솔라 피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