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의 확대와 함께 노농운동·무산정당운동이 발달하였고, 이에 따라 부르주아 사상과 맑스주의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동향 속에서 백남운은 식민지 민족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다. 수원농림학교 시절 농업문제·지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경제
역사는 과학이다”, 변화적, 진보적, 발전적인 것으로 인식
(7)김상기, <조선사교정>(1948): 해방 후에 서울에서 간행된 유물사관에 의한 대표적 통사 저술서 맑스주의의 도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독자성+논리정연
(8)손진태. <국사대요>(1949): 교양서로 저술, 통사, 한국사발전과정의 독창적인 견해 표
역사학계의 조류
1950년대 이후 남한에서는 일제의 식민주의 학자들이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내놓은 정체성 이론과 타율성 이론을 극복하는 데 지난 40년간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사회 내부에서 발전의 원동력을 찾아내고 한국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역사가 발전하여 온 것을 밝혔다. 그러나 남한
역사가들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순서를 매기고 정리하여 ‘체계(體系)’를 부여한다. 바로 이 체계 부여가 ‘시대구분’이다. 차하순, 시대구분의 이론과 실제, 27p
이러한 작업은 한 민족, 또는 한 문화권의 역사진행 전체를, 나아가서는 세계사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시도된다. 그러므로 시대구
인식과 정책을 견지하게 하였다. 이것은 운동계, 사상계, 학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고, 특히 학계를 중심으로 볼 때 이러한 동향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수탈증대와 ‘황민화’를 논리화하는 학문적 기반의 강화를 의미하였다. 그것은 두 측면에서 전개되었는데, 조선에 대한 식민지 수탈정책의 사상적,